셀 사역

제목2023년 4월 2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만 모르는 잠버릇을 가족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 있으면 솔직히 양심선언 합시다.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찬송가 338장) 
●  복음성가: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혁명적인 깨달음
● 본문 : 창세기 28:16-19
1) 야곱이 루스를 벧엘로 바꾸게 된 혁명적인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설교를 곱씹으며 말해보자.  

2) 야곱이 고백한 두려움을 건강한 두려움이라고 설명한 학자의 주석을 설교를 통해 되짚어 보자.
“야곱이 일생동안 경험했던 두려움 중에 본문에 묘사된 두려움이 유일하게 바람직하고 건강한 두려움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513.)
  

3) 적용하기
⓵ 내가 벧엘로 삼고 있는 내 삶의 루스에서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임을 실천하고 있는가?
⓶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삶’을 있다면 돌이키자.
⓷ 사순절 여섯 번째 주간 승리한 지체의 간증을 나누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⓹ 맡겨준 태신자를 위하여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2023년 봄 특새에 따른 사역 점검하기
2. 부활주일(4/9), 가족 모두가 예배에 참석하도록 독려하기 
3. 대 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4.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5.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6.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 16-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잠에서 깨어난 일성으로 고백한 내용은 혁명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지금 자기가 잠들어 있는 그 장소에 계신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이 야곱에게서 터져 나왔을까요?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가문적인 전통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일을 들었을 것이고, 보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그 장소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정화 되어 있는 야곱의 하나님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자기가 머물러 있는 루스 그 땅으로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전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특정 장소에 제한적으로 머물고 좌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공간적인 특정장소에만 머무는 분이 아니라,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금 선명하게 목도하였기에 야곱은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속 반응으로 자기가 머물렀던 그 장소에 오신 하나님을 기념하며 그곳에서 예배자의 예의를 갖추기에 이릅니다. 본문 18-19절을 나누겠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본인이 잠들었다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에서 자기가 베개로 삼았던 그 돌을 기둥으로 삼았고, 그 돌  위에 기름을 붓는 다분히 종교적인 행위를 한 뒤에 그곳의 이름을 루스에서 ‘벧엘’로 명명하기에 이릅니다. ‘벧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의집’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야곱이 깨달았던 혁명적인 깨달음이 주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무슨 말 장난이냐고 힐문하는 자가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레마를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교훈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 서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적인 핵심을 뛰어넘는 명제이기에 더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적 사고에 즈음하여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지켜야 할 대단히 엄격한 율례가 있습니다. ‘제사 장소의 단일화’입니다. 신명기 12:11-14절을 소개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 제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셨을까요? 그 이유를 박준서 박사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원칙은 신앙의 순수성과 직결되어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예배를 많은 곳에서 드릴 때, 자연히 가나안  원주민 종교의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고, 따라서 신앙의 순수성이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서 예배를 한 곳에서만 드리도록 하였다. 바로 택하신 그곳이었다.”(박준서,“성서와 기독교-구약성서”, 연세  대학교 출판부,p,68.)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물론, 가나안에 입성하고 나면 분명히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 신앙에서 떠날 위험성이 농후했기에 하나님은 이런 영적 혼합주의를 경계할 목적으로 제사장소 단일화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제사를 받겠다는 의지를 특별한 케이스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로 그 장소에만 계시는 분이라고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간이 만들어놓은 공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성전 산에 황금 돔으로 만들어진 이슬람 사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에서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을 했다고 믿기에 목숨을 걸고 그곳을 사수하려고 합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조금 전에 언급했던 대로 그곳이 신명기 율법에서 지정한 성전이 있었던 장소라고 믿기에 그곳을 되찾아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한다고 투쟁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 장소는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 충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화약고 같은 장소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간적인 장소에 머물러 계신 분으로 인간들이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알아도 정말로  너무도 잘못 아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루스에서 자신도 공간적인 특정한 장소에만 머물러 계시는 분으로 여겼던 비좁았던 안목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엄청난 현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는 주시는 곳이 벧엘입니다.
  공간적인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도록 가시화시키는 부분적인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임을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도 혁명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제 SNS 친구인 한희철 목사께서 페이스북에 사진 하나를 올렸습니다. 보고서 진한 감동을 받았기에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이 그림을 페이스북에 게재한 한 목사께서 이렇게 사족을 달아놓았습니다.

제목: 제단
  “예배당 한구석 노(老)권사님이 화초를 심는다. 세월 때문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일하신다. 오늘은 저 자리가 권사님의 제단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곧 벧엘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결코 내 현장에서 막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만에 하나, 주일에 교회 예배당에서 그럴듯한 신자의 모습으로 살고 표현하지만, 월요일부터 내 삶이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살려 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맥을 같이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삶의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않는 가증한 종교인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개역개정판에 ‘업신여김’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개역 판에는 ‘만홀(漫忽)히 여김’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만홀’ 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무시하며 함부로 하는 버릇없이 행동하는 행실’을 의미합니다. 만에 하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자각한다면 예배당이든 내가 처해 있는 현장이든 상관없이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함은 물론이거니와 늘 항상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현장을 벧엘로 생각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몇 주 전에 방송을 통해 접했던 익히 아는 사람이 쓴 산문을 읽었습니다. 방송에서 보았을 때 생각이 대단히  신선하고 진보적이어서 참 좋게 보았던 작가였습니다. 역시나 그의 글을 읽다가 많은 부문에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인지를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그 작가의 글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한 가지 안타깝게 생각한 부분이 있어서 유감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윤리적인 생활이 기성세대인 제가 보기에는 해석할 수 없는 선(線)을 넘은 것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작가는 더 젊은 시절,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신앙적이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아니라 적어도 지성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 앞서나가는 지성인의 인식을 갖고 사는 자이기에 거기에 걸 맞는 삶의 태도가 더 정돈되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상식입니다. 그것이 미흡해 보여 유감스러웠습니다. 세속적 영역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신앙의 영역에 있는 우리들이야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야곱은 루스에서 혁명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전 인생을 지배하는 경험으로 간직하고 계속해서 이 믿음으로 살았다면 아마도 야곱의 인생은 험악하지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시편 139편을 읽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편 139:1-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인의 찬양과 고백 속에서 오늘 설교자인 나를 전율하게 만드는 단어는 ‘거기 계시도다’ 와 ‘거기서도’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님은 나를 찾아오신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자리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이 삶의 예배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