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3월 19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기대하는 공정함이란?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460장 - 뜻 없이 무릎 꿇는 
●  복음성가: 예수, 하나님의 공의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공정하지 않으면
● 본문 : 창세기 28:1-9
1) 리브가와 이삭이 자행한 공정하지 못했던 행위는?
⓵ 리브가
⓶ 이삭  

2) 이삭과 리브가가 자행한 공정하지 못했던 일도 인해 본인과 자녀들에게 발생한 불행은?
⓵ 이삭과 리브가
⓶ 에서와 야곱
  

3) 적용하기
⓵ 공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여호수아 1:7)
⓶ 아모스 5:24절의 성취를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⓷ 사순절 네 번째 주간에 나눌 은혜가 있는 지체의 간증을 들어보자.  

4) 사역하기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⓹ 맡겨준 태신자를 위하여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사순절 기간 네 번째 주간, 주간 사역 점검과 피정
2.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합심 기도하기
3. 대 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4. 4월 3-8일(고난주간) 특별 집회 시간 스케줄 확보하기 
5.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6.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7.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사역하기 (WORK)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오늘 ) 본문은 이삭이 야곱을 불러 당부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에서에게 주어야 할 축복을
중간에서 비열하게 빼앗은 야곱에 주었던 사건에 대한 후폭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해라는 단어를 썼지 공감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삭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음을 먼저 밝힙니다. 또, 하나 주석적으로 살펴야 할 전 이해는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창세기 27:46-28:9절은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제사장 (p문서) 문서편집으로 삽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해석입니다.
  창세기 27:45 28:10절 다음에 곧바로 절이 이어져야 문맥이 매끄러워 지는데 편집자들이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이유를 조금 더 보충해야 했기에 27:46-28:9 . 절까지를 첨부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의 삽입구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본문 해석은 편집자들에 의해 이삭과 야곱 중심적인 차원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이 조금 더 명확해 집니다.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1-5절을 봅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아내 리브가가 계획했던 절 이하의 당부를 남편 이삭도 받아들였다는 정황으로 해석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처남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보내려는 이유는 아내 리브가가 야곱을 피신의 차원으로 보내려 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 적어도 장자가 받을 축복을 받은 자로 야곱을 인정했기에 자기가 아내를 맞이할 때 철저히 , 아버지 아브라함이 원했던 방식 그대로 가나안 여자와 혼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혈통 보존주의에 입각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밧단아람 즉 하란으로 보내 거기에 거주하는 처남의 자녀 중에 아내를 삼을 것을 간절히 소원했기에 그렇게 둘째 아들에게 밧단아람으로 보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선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복을 계대에 이어 받을 수 있는 신앙적 반응이라고 이삭은 생각한 것입니다 창세기. P문서 (주전  550-450년 사이의 제사장 그룹) 편집자들은 이삭이 그렇게 권한 것을 야곱이 그대로 순종했음을 밝힙니다. 5절까지는 이삭과 리브가의 소망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문 6-9절을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내력을 갖고 이 구절을 통해 에서가 무조건 비난받아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에서는 나름 피해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을 향하여 품어야 했던 미움이나 증오 역시 이해될 법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장자였던 에서는 동생에게 아버지가 축복하여 밧단아람으로 보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마음은쓰렸지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에서는 본인이 무엇부터 잘못 단추를 꿰었는지를 비로소 늦었지만 깨닫게 되었습니다. 26:34-35절의 잘못이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에서가 혈기 왕성한 때에 육신적인 매력을 보고 결혼한 헷 족속 출신의 딸들과의 결혼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부모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나에게 임할 복까지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결론에 도달한 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돌이키는 방법은 가나안 출신이 아닌 새로운 아내를 맞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친족 결혼을 감행합니다. 다시 본문 8-9절을 보겠습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부모들이 헷 족속의 며느리로 인해 근심한다는 것을 알았던 에서는 이번에는 친족 결혼으로 반전을 모색합니다. 이스마엘의 딸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이 아닌 큰 아버지의 딸이자 자신과는 사촌관계에 있는 마할랏과 결혼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부모도 거부할 수 없는 친족 간의 성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서는 뒤늦게라도 부모에게서 멀어진 애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물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에서의 선택에 대해 부모들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⓵ 이스마엘은 분명히 이삭의 이복형이었지만 성장 과정에서 항상 놀림을 주던 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찾아와 큰 상주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다지 좋은 감정과 관계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⓶ 이삭은 일부일처의 관계를 평생 유지했던 부부였습니다. 이런 관계로 살았던 이삭과 리브가는 큰아들이 세 번째 아내를 맞이한 일부다처제가 탐탁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에서는 노부모에게 인정받으려는 계산으로 진행한 결혼을 통해 부모를 속상하게 했고 또 한 번의 가정적인 혼돈을 가져오게 한 골칫거리를 제공한 결과를 갖고 온 것입니다.
이상이 본문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주석적 이해입니다. 주목하고 또 주목해야 하는 영적 가르침을 본문 이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공정하지 않은 신앙의 일탈은 불행의 단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수요일 설교부터 오늘까지 야곱과 에서에 대한 결과물을 끄집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주 동안 이루어진 수요 설교의 포인트는 에서보다도 리브가에 의해서 자행된 범죄가 더 공정하지 않았다는 대전제였습니다. 늙었기에 그렇다고 변호하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용서가 되는 이삭의 실수도 밧단아람으로 야곱을 보내는 것 역시 그리 공정해 보이지 않는 대목입니다.
  에서가 뒤늦게 잃어버린 부모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좋은 뜻으로 진행했던 세 번째 결혼에 대한 부모의 태도 역시 대승적 차원으로 바라볼 때 품어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모들로 인해 불공정하게 이루어진 게임으로 인해 초래된 비극이 무엇이었습니까?

㉠ 장자의 결국은 차자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반대자의 후손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차자의 결국은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야곱을 더 더욱 그랬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었던 평온한 땅 브엘세바를 떠나 멀고 먼 하란으로 도망해야 했던 도망자가 됩니다. 그가 형을 속였던 사기꾼적인 행각으로 인해 하나님은 20년 동안 그의 삼촌에게 속임을 당하는 인과응보적인 심판을 당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상적으로 벌어진 두 형제의 삶을 반추하면서 창세기 27:45절에서 발언한 리브가의 발언을 떠올려야 합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리브가는 본인이 자행한 공정하지 않고 편파적인 잘못된 사랑하기의 결과물로 초래될 수 있다고 두려워했습니다. 두 아들을 동시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계산된 야곱의 하란 행 권유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런 메타포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차원에서 공정하지 않은 범죄를 행한 리브가에 대한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음을 본문이 보고합니다.
  오늘의 언어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공정한 길 가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편파적인 길로 가지 않겠다는 결기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아무리 큰 압박과 압력이 있어도 물리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믿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1:7절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구절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이 구절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무엇입니까? 공정하기 위해서는 담대함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 성찰하면 기막힌 교훈이 아닙니까? 좌고우면하지 않는 공정함을 지키는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적인 체제, 이념을 갖고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공정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칙에서 떠나지 않고 천착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걷는 독서’에서 이런 글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힘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의 힘을 가진 자”(박노해, “느린 걸음”, 걷는 독서,p,94)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위의 책, p,140)

이 글말을 읽고서 저는 이런 서평을 남겼습니다.
“권력 쟁취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내리는 죽비다. 마약에 중독된 유명 연예인이 명예 살인 당했다. 반면 사랑이  배제된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버젓이 활개 치며 난장을 벌이고 있는 데도 그들은 건재하다. 이런 이율배반이 또  어디에 있나! 작가가 말했듯이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이 문장을 찬송가를 통해 수없이 고백했다. 그럼에도 작금, 정치하는 자들은 온전히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이렇게.”
“강한 자 힘주고, 약한 자 죽이고”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좌든 우든 결코 공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갖는 것은 앞서 여호수아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공동체는 이 일, 즉 공정함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기에 저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그래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아모스 5:24절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결론) 제가 참 좋아하는 복음성가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뜨거워짐을 여러 차례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 주신 창세기 94번째 강해 말씀을 기억하며 이 찬송의 가사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예수 제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예수 하나님의 사랑/주 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