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좋아하는 꽃 소개하기, 더불어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해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545장: 이눈에 아무 증거 ● 복음성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이해가 되지 않을 때 ● 본문 : 창세기 27:1-40 1) 야곱과 리브가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담임목사의 해석을 비교하고 진단해 보자. 2) 하나님께서 야곱과 리브가의 일탈을 그대로 놔두신 이유와 그 결말을 설명해 보자. ⓵ 놔두신 이유: ⓶ 비뚤어진 윤리적 가치를 갖고 바르게 살지 못했던 두 사람이 받은 대가는? |
3) 적용하기 ⓵ 하나님은 나를 이해하실까? ⓶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신다면 대 전제가 있다. 성찰해 보자. ⓷ 사순절 두 번째 주간에 나눌 은혜가 있는 지체의 간증을 들어보자. | 사역하기 (WORK)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 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사순절 기간 두 번째 주간, 주간 사역 점검과 피정 2.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합심 기도하기 3. 토요일 청소 솔선수범하여 봉사하기 4. 4월 3-8일(고난주간) 특별 집회 시간 스케줄 확보하기 5.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6.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7.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론) 젊은 시절부터 제가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본문이 오늘 텍스트입니다. 목사라는 직을 갖고 사는 사람 이기에 소위 말하는 ‘구속사적인 흐름’이라는 대세를 대입할 때, 무엇이든 용서가 되는 몰이해로 본문을 해석한 수많은 설교들이 난무한 것이 사실이지만, 비평적인 성찰로 본문을 해석하려고 한 글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 해서 저는 오늘 본문을 민감하게 비평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할레 대학의 헤르만 쿵켈 교수의 해석처럼 큰 그림으로 보면 네 가지의 틀을 갖고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 p,330, 재인용) ⓵ 장면 1: 아버지가 장남을 축복할 준비를 함 (1-4) ⓶ 장면 2: 어머니가 작은 아들을 위해 계략을 꾸밈 (5-17) ⓷ 장면 3: 작은 아들이 아바지를 속임 (18-29) ⓸ 장면 4: 아버지가 장남을 인하여 슬퍼함 (30-40)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이 틀 안에서 본문 이야기는 전개 됩니다. 이삭이 열조에게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을 정도로 노쇠했기에 큰아들 에서에게 축복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큰아들에게 사냥을 해서 애비를 위해 별미를 만들라고 명합니다.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에서는 들로 나갑니다. 주목할 것은 남편이 큰아들을 축복 하겠다는 이 옵션의 말을 리브가가 엿 들었다는 점입니다. 작은 아들을 편애하던 리브가는 곧바로 야곱에게 아버지를 속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8-17절) 이렇게 시작된 축복 가로채기는 과정 중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뚫고 야곱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18-30) 결국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렸던 에서의 경솔함으로 인해 아버지에게서 받을 축복까지 빼앗겨 버리는 비극을 에서가 맛 본 것으로 본문 줄거리가 흘러갑니다. 에서는 간교한 동생에게 복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알고 대성통곡하며 다른 복을 달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야곱에게 떠 안겨 버린 복 말고는 다른 복을 줄 것이 없었던 아버지 이삭은 큰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김으로 본문 텍스트는 마무리됩니다. 본문 40절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우리는 오늘 본문 텍스트를 이미 선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 본문을 별 무리 없이 평이하게 해석하려면 장자권을 소홀이 여긴 에서는 그 심판으로 복을 빼앗겼다는 것으로 주입해야 하며, 또 주입해 왔습니다. 또 하나,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고 결국 그를 통하여 구속사가 완성되게 되었다는 메시지로 야곱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리브가와 야곱의 행위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처럼 그렇게 수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해 오늘은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구속사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네 명의 족장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들이기에 그들이 행한 일체의 부정적인 행위는 용서 되는 것일까에 대해서 저는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외연을 축소하겠습니다. 야곱은 성공한 족장이 었습니까?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용하셔서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을 맞지만 그의 행위 자체를 묵과하시면서 암묵적으로 동의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행위 자체에 대해 심판하셨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콜롬비아 신학교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해석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행한 불공정한 행동이 새로운 분노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도망자가 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위의 책, p,357.) 무슨 말입니까?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복의 권리가 있는 장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장소에서 떠나야 했고, 도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편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혹자들은 이렇게 은혜롭게 해석합니다. “에서가 살고 있었던 살기등등한 장소가 바로 세상이었다. 세상의 논리는 바로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야곱으로 구별하여 따로 떼어 놓으셨다.”
정말로 은혜로운 접근처럼 보이는 해석이지만 저는 이 의견에 1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설교자인 제가 접근하는 방식은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은 야곱에 대해 하나님의 적극적인 심판 모드가 집행됩니다. 어떻게요? 브엘세바에 살지 못하고 다시 밧단아람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영국 글로체스터 대학의 고든 웬함 교수도 저의 의견을 지지해 줍니다. “야곱은 형제마저 살인하려는 형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집에서 도망가야 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며칠 만’ 떠나 있으면 될 것이라고 희망했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다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한다. 속이는 자 야곱의 경우에 그는 장인 라반에 의해서 잔인하게 속임을 당하여 아름다운 라헬이 아닌 사랑하지 않는 레아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결코 레아와 그녀의 아들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는 쓰라린 갈등만이 남은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야곱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처럼 남은 인생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며 인생을 보내게 된다. 따라서 해설자는 야곱과 리브가의 행위가 가지는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음을 지적한다.” (고든 웬함, “WBC-창세기 주석”, pp,397-398.)
정리하자면 흔히 보수적인 계통에서 주장하는 대로 야곱과 리브가의 행위에 대해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이해가 아니라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을 행할 때,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리브가와 야곱의 일탈을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의 힘으로 불법을 행하는 리브가와 야곱의 범죄를 저지하지 않으셨을까?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지금 이 우주의 전쟁 상태를 자유의지를 위해(즉 하나님이 줄을 잡아 당겨여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세상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이 진짜 선을 행하거나, 악을 끼칠 수 있는 세상, 진짜 중요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로 생각하신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pp,87-88.)
하나님은 야곱과 리브가를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줄을 잡아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이며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에서를 속이면서 에서의 복을 가로챈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여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문장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어서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임에도 안 하시는 것이다.”
엄청난 성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수요 예배 시간에 우리는 설교 제목처럼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다시 한 번 각인하게 됩니다.
상업적인 부흥사가 말하는 상투적인 멘트로 오늘 레마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는 메시지 교훈은 이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야곱과 리브가 같은 존재까지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을 도구 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까지. 아제르바이젠에 거주하면서 주의 일을 위해 날마다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삶을 살고 있는 지인 집사께서 공교롭게 사사기를 묵상한 글들을 본인의 SNS에 올렸습니다. 기드온에 대한 긍정적 평가 일색이었습니다. 평신도 사역자이니까 기드온에 대한 성서 앞, 뒤의 이해가 한계가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뇌는 이미 사사들에 대한 이미지가 영웅처럼 각인되도록 학습되었고, 교육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책에서 밝혔듯이 기드온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사사였습니다. 시작이 잘못된 사사였습니다. 더불어 특별히 사사기 6장에서 사사기 기자에 의해서 보고된 기드온 사사 만들기는 눈물 겨운 하나님의 일방적 러브스토리였습니다. 단 1%의 사사로서의 자격도 갖추지 못했던 자격 미달인 기드온을 향하여 참고 기다리시고, 또 조각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심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산파극처럼 보일 정도 애처로운 원 사이드 러브 스토리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었던 기드온이었건만 기드온은 끝까지 하나님을 실망시킨 대표 주자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로 인해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아비멜렉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인물로 성경 역사의 오점을 남겼고, 그의 후배들이었던 입다, 삼손은 점입가경의 최악의 사사들로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까? 답이 명백해 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 외의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해석이 안 되면 그 끝에는 언제나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간교한 야곱이 누구입니까? 가정을 풍비박산 나게 한 편애의 주인공 리브가가 누구입니까? 1%의 자격이 안 되던 기드온이 누구입니까? 딸을 인신 제물로 바쳤던 입다가 누구입니까? 쥐색잡기에 혈안이 되어 결국에 패가망신한 삼손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 안에 소개된 성경 속의 인물입니까? 그럴 리가요? 이렇게 적용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들이 바로 ‘나’입니다. 결코 부인하지 못할 답입니다. 이런 살벌함이 내게 적용된다면 우리는 오늘 레마에 고개 떨구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내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조건과 해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사사기 6: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기드온이라는 단어에 여러분의 이름을 대입하십시오. 은혜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미리 알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에 맡기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김영봉, “그 사람, 모세”, 복 있는 사람, p,27.) 뜨거운 마음으로 아멘하며 밑줄 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붙들고 계시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의 사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불가사의한 기적은 이해가 됩니다. 어떤 사실입니까? 은혜였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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