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2월 12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담임목사 4번째 책 읽고 은혜 받은 대목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  복음성가: 하늘소망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끝까지
● 본문 : 창세기 26:12-22
1) 이삭이 빼앗겼던 우물들의 이름과 그 뜻을 나누어보고 마지막 우물의 의미를 새겨보자.
⓵ 에섹, 싯나, 르호봇
⓶ 르호봇의 영적 의미  

2) 예레미야 20장에서 예레미야가 궁극적으로 고백했던 7절과 9절의 신학적 관계성을 나누어 보자.
⓵ 20:7
⓶ 20:9
⓷ 신학적 관계성  

3) 적용하기
⓵ 이삭과 예레미야가 갖고 있었던 영적 무기의 공통분모는?
⓶ 지체들 중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무기인 ‘끝까지’의 은혜를 경험한 지체가 있으면 공유해 보자.
⓷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블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정해진 태신자 구원을 위해 중보하기.
2. 2월 사역을 위해 (종고청년부 동계사역 지원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합심 기도하기
4. 주일 셀 사역을 위해 서로 격려하기
5. 공 예배 범하지 않기 독려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이어지는 창세기 26장 14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랄에 정착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데 농사를 지으면 백배를 주셨기 때문에 거부가 되었다고 보고함과 동시에 이삭이 거느리게 된 양과 소떼 그리고 종들까지 많아졌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랄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원류인 블레셋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이 그에게 임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에서 이런 뉘앙스가 풍깁니다. ‘시기했다.’는 단어입니다. ‘시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나’는 ‘매우 나쁜 의미에서 자행하는 질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의 뒤에 부정적이고 그릇된 어떤 행위들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랄 거민들이 행했던 몹시 부정적인 행위를 본문 15-22절이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열거한 구절을 살피면 주목할 만한 일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 ‘카나’의 갈등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파놓았던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흙으로 덮어버리는 훼방을 했던 창세기 21:23-25절을 다시 강행하는 방해였습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핀 것처럼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우물을 파놓았는데 그것을 아비멜렉 사람들이 빼앗았던 과거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이 일을 두고 다시 화해하며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했던 조약을 맺습니다. (창 21:25-26)

  그런데 이삭의 때에 이 조약은 무효화됩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는데 그랄 왕 아비멜렉의 묵인 아래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다시 흙으로 메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본문이 증언합니다. 발끈할 일이었지만 이삭의 종들은 싸우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곳에서 다시 물이 나오게 하셨는데 시기한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이 파서 나오게 한 우물을 빼앗았다고 보고합니다. 

  그 첫 번째의 우물 이름을 ‘에섹’(다투다)이라 명명했다고 했습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해 우물을 빼앗긴 이삭과 그의 종들은 힘으로 그들을 대적하지 않고 또 다른 지역인 싯나로 이동하여 우물을 팠습니다. 하나님이 싯나(대적하다-사탄의 어원)에서 또 물이 나오게 하셨는데, 이것을 안 그랄 목자들이 또 그곳까지 따라와 이 지역은 우리 땅이니 이 우물도 우리 것이라고 생트집을 잡는 일이 벌어지자 이삭과 그의 종들은 또 그곳에서 싸우지 않고 다시 다른 장소인 르호봇으로 이동하여 다시 우물을 팠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그렇게 옮겨간 땅에서도 하나님은 이삭의 무리들이 판 곳에 물이 나오게 하셨기에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경을 넓혀주셨다는 의미로 ‘르호봇’이라고 명명했는데 이곳에서 드디어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거는 다툼이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우물에 관한 분쟁이 일단락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15-22절에 걸쳐 기록된 우물 개발사는 이삭이 정착한 르호봇을 끝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아브라함이 팠던 익명의 우물을 시작으로 에섹-싯나-르호봇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투쟁과 굴곡 끝에 얻어낸 이삭의 정착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89번째 강해 사역을 진행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이런 은혜로 진입해 보고자 합니다. 정말로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랄에 머물렀던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렇게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삭이 복을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그랄에 머무렀던 순종이 그 이유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내용 한 가지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이삭이 복을 받은 또 하나의 외형적인 이유는 이것입니다.

※ 이삭이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삭은 그랄에 거하면서 적지 않은 핍박을 받은 셈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땅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솟아나왔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지역은 물이 넉넉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옮길 때마다 물이 솟았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냈던 이삭과 그의 종들은 토후 세력들의 무력과 시비로 인해 속수무책 그 좋은 우물들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삭의 식솔들이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공식으로 실력행사를 하며 방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맨 처음 파서 생성하게 만든 우물을 위시하여 이후 에섹에서 빼앗기면 싯나로, 그 싯나에서 빼앗기면 르호봇으로 옮겨 다시 우물을 파는 수고를 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다. 다행이 르호봇에 이르러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걸지 않아 일단락이 되었음을 보고하고 있지만 그 동안의 마음고생은 안 보아도 비디오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이삭이 이런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그랄 목자들의 물리적인 시비에 끝까지 대항하지 않은 것은 이삭 자신이 성인군자이었기 때문일까요? 어떤 주석가는 이삭을 성경에 기록한 온유한 성품의 최고봉에 있었던 자라고 해석하며 마태복음 5:5절에 기록하고 있는 온유한 자에게 임하는 복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외연을 확장한 것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의 성취자라는 의미입니다. 굳이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조금은 과유불급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이삭이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엄청난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마태복음 5:5절에 대입하여 이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다른 스펙트럼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너무 단순해 보이지만 정말 그렇게 믿기 때문에 대입해 봅니다. 무엇일까요? 이삭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은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는 싸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랄에 거하게 될 때 주시겠다고 선언하신 복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의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언급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6: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아버지 아브라함의 계대를 이어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이 지금 자기에게도 임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이 머무름에 대한 순종은 적어도 이삭이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일하신다는 100%의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순종인 것을 감안할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했던 이삭은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걸면 싸우지 않고 이동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우물을 주신 것을 시기하여 그랄 목자들이 딴지를 걸면 또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이동한 끝에 르호봇에 이르러 하나님이 일하심의 마침표를 찍으신 것까지 이삭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 유다 말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습니다. 조국 유다에 불리한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매국적인 예언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의 참수한 머리를 저작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을 상상하게 하는 폭력을 예레미야는 당합니다. 바스훌은 본때를 보인다는  명목으로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걸어 두어 사람들이 보게 하는 수치를 줍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했던 나약한 인간인 예레미야에게 왜 자괴감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시며 당신의 신탁을 알려줍니다. 요약하면 바스훌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은 이루어질 것임을 재확인해 주십시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그 뜻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수모를 경험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20:7절에서 대단히 민감했던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여과 없이 토로합니다. 이 토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의 토로였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김기석 목사는 ‘끙끙 앓는 하나님’에서 20:7절에 대한 웃픈 해석을 남겼는데 탁월합니다. 소개하겠습니다.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의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한 ‘파타하’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꽃자리p,224.) 저는 김기석 목사의 이 해석을 차준희 교수의 글에서 먼저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 (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 프리칭 아카데미,p,219.)
  무슨 말입니까?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께 항변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예언자가 되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마치 나를 강간하는 것처럼 완력으로 억압해서 예언자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나에게 돌아온 것은 복이 아니라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하나님 책임지세요. 내가 언제 예언자가 된다고 했습니까? 언제.”

  심정적으로 100%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입니다. 완전히 손절하는 것이 답입니다. 그런데 손절했습니까? 이어지는 그 유명한 예레미야 20:9절은 설교자인 나를 울컥하게 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결코 다시는 하나님 관계를 맺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불만을 토로했던 예레미야가 이렇게 다시 고백한 것입니다. 20:9절도 김기석 목사의 글로 풀어 봅니다.  “예레미야에게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 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그래서는 그는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 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pp,225-226)

  예언자 예레미야는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은혜를 끝까지 잊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놓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젊은 목사로 천방지축 뛰며 목회하던 시절, 목회가 힘들어져서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따졌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인간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허비하라고 목사 만들었습니까? 책임지십시오. 나는 이 교회에서 결코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간다고 해서 여기와 왔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셨으니까 왔지.” 하나님께 삿대질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렇게 갈갈이 영적으로 부서지고 부서져 하나님께 부르짖던 어느 날, 하나님에 제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제게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3:1절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참 많이 전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구절에 기록된 한 단어 ‘끝까지’에 저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내가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불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 ‘끝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본문의 이삭처럼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끝까지 일하시는 그 일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이시라면 나도 ‘끝까지’이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