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2월 5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노하우 공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284장: 오랫동안 모든 
●  복음성가: 나는 연약하오나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불완전하지만 
● 본문 : 창세기 26:1-11
1) 아브라함과 이삭의 불완전했던 공통분모를 본문 설교를 통해 이해해 보자.
⓵ 아브라함: 창세기 12:10-20, 창세기 20:1-18
⓶ 이삭: 창세기 26:6-11  

2) 불완전하고 연약했던 아브라함과 이삭이었지만 이 두 사람을 쓰셨던 이유를 레마로 연결해 말해보자.
⓵ 레마: 인간의 책임적 반응이 순종
⓶ 아브라함의 순종
⓷ 이삭의 순종  

3) 적용하기
⓵ 내 연약함의 특성은 무엇인가? 깊이 성찰하여 정직하게 끄집어 내보자.
⓶ 연약함을 근거로 순종할 수 있는 내용과 결단들을 나누어 보자. (입으로 하는 결단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인 내용으로)
⓷ 두 번째 적용하기를 이루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블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태신자 정하기 확인하여 명단 제출하기 (부교역자에게)
  한 주 더 시간을 줍니다.
2. 2월 사역을 위해 (중·고·청년부 동계사역 지원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합심 기도하기
4. 주일 셀 사역을 위해 서로 격려하기
5. 공 예배 범하지 않기 독려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이삭이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고 있던 어느 해, 아버지 아브라함이 당했던 흉년을 이삭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피력합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첫 번째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피해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기는 정황이 본문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달리 전혀 다른 장면이 이삭에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에게 오셔서 방해하신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머무를 것을 명령하신 땅이 1절 정황에 따르면 그랄 땅이었습니다. 그랄은 창세기 20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가축들에게 먹일 목초들이 다 떨어지자 두 번째로 목초가  풍부했던 동선을 옮겼던 장소였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잠시 거주했던 그랄로 이삭도 삶의 자리를 먹고 살기 위해 옮긴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플롯을 구성하기 위한 것처럼 여겨지는 대목이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 땅으로 옮겼을 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 사라의 미모로 인해 자기가 남편인 것을 알면 그랄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것을 염려한 신앙인답지 않은 부끄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부전자전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문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그 부끄러운 행동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이유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이유였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하지만 이런 이삭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아 탄로가 납니다. 이삭이 아내에게 보인 애정행각이 아비멜렉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 8-9절입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껴안다’라고 번역된 ‘메차헤크’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애무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부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목격한 아비멜렉은 곧바로 이삭을 불러 추궁하기에 이르렀고, 이삭은 자기의 신변에 위기가 올까봐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합니다. 아비멜렉은 그랄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사형을 당한다고 법을 제정함으로 이삭이 리브가를 누이로 둔갑시켰던 일련의 해프닝이 마무리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이 단락만 놓고 보면 두 번째 족장의 페이지를 장식한 이삭, 정말로 대단히 실망스러운 인물입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이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죽인다고 법령을 발표 한 일을 보면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보다 더 멋져 보이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품없고 형편없는 인간이었던 이삭을 대우한 하나님을 조명해 보십시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삭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본문 2-5절까지의 말씀을 적용하면 대단히 중요한 영적 감동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결코 낯설지 않은 구절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게 복을 줄 것이다.” 4절은 연이어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 이어 대를 거쳐 승계됨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6-11절 단락에서 보여준 이삭의 행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삭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을 만한 믿음의 재목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삭에게 그대로 이어질 것을 확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본문 기자는 그 답을 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결국 이삭에게 임한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라는 직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묵묵히 율례와 법도와 명령에 묵묵히 순종한 사람이었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 역시, 부족한 것을 말하자면 지천에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하란에서 머무르려고 했던 나약함, 두 번에 걸쳐 가나안 땅에서 이방 땅으로의 이주하려는 불신앙,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불신앙,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한 일탈, 후처들을 봄으로 인해 구속사의 여정 중에 상당히 많은 방해물을 낳은 실례 등등 아브라함 역시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감동이 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함과 불완전함이 배어 있었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연약함을 볼모로 삼지 않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조각했고, 만들어 가심으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이끌었던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는 대단히 감동적인 여운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다시 5절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아브라함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까지 복이 계승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수요 설교를 통해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건져 올려야 할 은혜가 있음을 엿보게 됩니다.

※ 하나님은 연약함 자체를 보시지 않고 연약함 속에서 행하는 순종을 통해 복 주신다는 감동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공통분모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복을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로 계승하셨습니다. 문맥으로 본다면 이삭이 복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덕 때문이었습니다. 연약했던 두 사람을 하나님이 그 연약함을 책잡아 책임을 묻고 공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까지도 보듬어 안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은혜의 제 일 순위는 분명히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렇게 일하시는 은혜만 있고 두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책임적 반응은 전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의 긍정적 공통분모이지만 본문에 의거하여 이삭에게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책임적 반응 하나를 교우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 순종입니다.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렇습니다. 그랄(블레셋)에 거주하면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 즉 그랄 땅에 머무르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흉년으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떠나는 목적지라면 애굽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애굽 행을 포기하고 또 다른 이방의 땅인 그랄에서 멈췄습니다. 브엘세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랄 땅 역시 대 흉년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바로 그랄에서 멈춰 섰습니다. 본문 정황에 따르면 다른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위대한 순종은 연약함 가운데에서 행하는 순종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상태에서의 순종은 엄격한 의미에서 순종이라기보다는 생리적 가능성에 따라 그냥 한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의 불리함이 버젓이 보이는데 그 불리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순종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10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 2차 전도여행의 동선을 마케도냐로 들어가 빌립보라는 도시로 향하는 유럽 선교의 시작을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제 2차선교여행의 동선은 아시아 행이었습니다. 아시아로 향하는 프로젝트를 세웠는데 성령이 막으셨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드로아로 내려가게 되었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빌립보로 들어가는 전진기지인 드로아에서 네압볼리를 거쳐 들어가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스케줄로 이동하기 위해 자신의 스케줄을 꺾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순종이라는 믿음의 행위에서 결코 쉬운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중에 무슨 자격을 논할 때, 그 일을 완전하기에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그대로 모두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감동의 감동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은 나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그대로 받으신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순종하는가를 보십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연약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순종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불완전하여 감히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은 그 불완전함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 안에서 복을 주시며 역사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