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456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 복음성가: 다시 일어섭니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이스마엘을 보면서 ● 본문 : 창세기 25:1-18 1) 구속사를 이어갈 주인공이 이삭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⓵ 창세기 15:4-7절 참고 ⓶ 창세기 17:19-21 결론: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이었기 때문임. |
2) 이스마엘은 구속사에서 탈락되었기에 실패자인가? ⓵ 창세기 17:20 참고 ⓶ 아버지의 장례를 인도한 이스마엘을 통해 얻는 성경 외적인 소회로 질문에 답해 보자. |
3) 적용하기 ⓵ 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가? ⓶ 나는 상황을 핑계로 하나님의 일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복기하라 ⓷ 이스마엘 재평가하기 | 사역하기 (WORK)인도: 홀수 주 셀 리더, 짝수 주 인턴 인도 (경우에 따라 3주, 1주로 인도를 배분할 수 있음) 첫 주에 태신자 임신하기 사역 반드시 진행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베스트 초청 예배 시간에는 보강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 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태신자 정하기 2. 지체들과 인사하면서 교례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소개하고 합심 기도하기 4. 피선교지를 위한 기도 5. 주일 셀 사역을 위해 서로 격려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론) 본문 7-10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창세기 기자가 남긴 아브라함의 마지막 이력 보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지 꼭 100년 만에 생을 마쳤음을 알게 해 주는 보고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칭되는 아브라함의 일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가를 여지없이 살폈습니다.
가나안을 중심으로 이해를 할 때, 전혀 생소하고 낯선 이방의 땅인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을 부르셔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가나안 땅인 에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던 아브라함은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에벤에셀의 인생이었고,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임마누엘의 삶이었으며, 모리아 산에서 일구어낸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여호와 이레의 삶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이 신앙의 여정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천로역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이후, 100년이 되는 175세의 그 어느 날, 생을 마감했음을 본문이 보고합니다. 그는 그의 사랑했던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굴에 매장되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후,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한 가지 의미 있는 여운을 남깁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구원의 구속사가 이삭이라는 100세에 낳은 아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이라는 정통 계보를 통해 그 약속이 실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경이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쓰임 받은 계보를 주류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설교의 텍스트 마지막 구절에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했음을 적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내용이 본문에 삽입되어 있음도 주목해야 합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 였으니” 이 구절을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마엘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송병현 교수의 주석에 담긴 이스마엘에 대한 해석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그의 장례를 치렀다. 이스마엘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유산 한 푼을 남겨주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내쫓을 때 음식과 물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아버지, 평생 이삭만 사랑하고 자신을 냉대했던 아버지 였다. 이처럼 상처만 주었던 아버지였는데 그의 죽음을 듣고 찾아와 슬퍼하는 아들 이스마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437.)
이 구절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렇게 치욕을 당했고, 수모를 당했던 아들 이스마엘이 그 수모를 주었던 장본인이자, 당사자였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례식을 찾아와 큰아들로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던 빗금을 이삭이 철폐한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에 철폐했다는 감동이 제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재론하지만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역시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이 차지한 지면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이스마엘이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감동의 한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1-6절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 외에도 후처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두라와 욕산이라는 여인들입니다. ‘후처’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피레게쉬’는 긍정적인 단어라기보다는 조금은 피하고 싶은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피레게쉬’는 ‘정부’, ‘창녀’ 등등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그두라와 욕산을 이런 부정적인 여인으로 묘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라와는 급이 다른 후처로 표현한 것을 보면 구속사의 흐름에서 볼 때 열외의 여인들이었음을 표하고 싶었던 창세기 기자의 기법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처들을 열거하며 그녀들에 게 낳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보면서 제가 다시 주목하는 것은 5-6절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이 구절만 보더라도 성경이 얼마나 철저하게 구속사적 계보 중심으로 기록되었는가 여지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5-6절을 참고하더라도 주인공은 이삭입니다. 에둘렀지만 이 본문에서 이스마엘은 역시 조연입니다. 아버지에게 물 려받은 것은 쥐꼬리만 한 재산 일부였습니다. 주지했다시피 이스마엘은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습니다. 설상가 상으로 아브라함은 살아생전, 이삭에게 나머지 배다른 형과 동생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아예 삶의 터전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강수를 두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다시 재론하지만 본문 9절은 다시 한 번 제게 이스마엘로 인한 감동을 받기에 충분한 구절입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낸 이스마엘, 그는 빗장 철폐의 주인공이었습니다.
※ 하나님 나라는 이스마엘이 주연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남긴 유감은 이삭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아브라함이 붙들었다는 점에 이견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아브라함이 가져야 했을 믿음의 내용이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갖고 있는 객기라고 할까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남긴 마지막의 행보에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이스마엘의 반응에는 극찬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과유불급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스마엘이야말로 또 다른 구속사의 한 획을 긋게 만들어주었던 주연급 조연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려고 하는 주체들은 대체로 주연급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적자와 서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서열 매기기라는 차별도 존재하지 않으며, 더 더욱이 빗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엘리에셀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이 존재할 수 있었고, 이스마엘이 있었기에 이삭이 빛날 수 있었습니다. 아론과 훌이 없는 모세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갈렙은 여호수아를 있게 해준 진짜 영웅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기억에 성군이라고 생각하는 다윗의 뒤에 요나단의 자기포기가 있었기에 다윗이 가능했습니다. 바울을 바울로 만들어준 바나바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주연입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의 훼방과 핍박 으로 인해 그의 사역이 중단 될 수 있었지만, 베드로를 베드로 되도록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베드로 구출을 위한 비상 연합기도회 자리에 있었던 로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어도 괜찮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는 빗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 세인 지체들은 포기하지 말고 감당해야 하는 한 가지의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 환경 핑계대지 말고 이스마엘의 성실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지켰습니다.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매장하는 상주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12-18절 본문에 이스마엘의 족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스마엘의 족보(톨레도트)는 구속사에서 배제된 족보이기에 눈에 들어오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죽음이라는 기사를 감싸고 있는 창세기 기록 배열에 한 축을 담당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스마엘의 계보 배려는 그가 아브라함의 장자였다는 점을 감안한 창세기 저자의 배려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를 장사한 이후, 47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고 삶을 마감했습니다. 구약학자 월트케(Waltke)는 창세기 25:12-18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었을 때 나이를 창세기 기자가 기록한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그의 특별하고 복된 삶을 상징한다.” (송병현, 위의 책, 441)
결론)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근래 발표한 노래 중에 ‘아버지의 사진’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겠 지만 임재범이라는 가수의 아버지는 유명한 아나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중 살림을 하는 바람에 배다른 자식 들을 낳아 평생 갈등의 이유가 되는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임재범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과 치열한 애증의 관계였습니다. 그토록 증오했고, 미워했고 싫어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의 손절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노래를 한 곡 만들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사진 문득 떠오르겠죠/참 많이 울 것 같아요/미움과 그리움 사랑과 원망이 섞인 복잡한 마음이죠/차가운 길목에 서서/참 오래 기다렸었죠 그 맘을 얻으려 그 맘을 이해하려/기웃대던 시간들/다른 게 보여요 당신의 나이가 되니 감당 못 하셨을 그 무게와 외로움들이/할퀴던 순간도 속은 아프셨을 그 맘/사랑이었을까요 둘이서 같이 걷던/단 한 번의 추억 있어요/ 언제나 분주한 뜻 모를 당신 삶 속에 난 늘 혼자 같았죠/내가 닮았네요/미워한 그 모습까지 다가 설 수 없게 멀었던 조용한 사랑 어떤 세월에도 결국 보고 싶은/대체 가족이란 뭘까요/다른 게 보여요 당신의 나이가 되니 소리 못 내셨을 고뇌와 두려움들이/화내던 순간도 어쩜 사랑이던 내 맘/이제서야 꺼내요 문득 떠오르겠죠/참 많이 울 것 같아요/사진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온 길은 복잡한 마음이죠/이별은 미움을 덮죠
이스마엘에게 왜 이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이스마엘은 더 하면 덜 하지 않을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을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여전히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는 구속사의 계보에서 탈락된 조연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그늘진 구석에서 이어갔던 또 한 명의 숨어 있었던 주연이었다는 것을.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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