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본론)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삽입되어 있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와 더불어 기독교인이 아닌 문학자들도 공히 인정하는 최고의 비유 문학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담긴 메시지는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질문을 받으신 뒤에 이렇게 그에게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기 기록을 어떻게 읽었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쉐마로 답합니다. “마음, 목숨, 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학습 되어 있는 답을 한 율법교사에게 비수를 날립니다. 말로만 고백하지 말고 기록된 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렇게 뼈 있는 대화를 나누신 주님은 곧바로 앞에서 언급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율 법교사에게 던집니다.
오늘 본문이 이 내용임을 우리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명의 인물을 본문에서 등장시킵니다. 강도를 당한 자,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출신의 어떤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을 무대 위로 올려보십시다. 강도를 당한 자입니다. 이 사람은 유다 사람일까? 아니면 사마리아 출신일까? 신학자 하워드 먀샬은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이 사건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예루살렘이나 그 근교에서 일어났을 가능성 이 크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17 마일(27km)인 거리이며 해발 3,300피트(100,5m)를 내려가다가 강도떼를 만났다. 이 길은 빈들을 지나고 바위가 많은 지형이기에 산적 떼가 운거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하워드 마샬, “국제성서주석-누가복음”, p,86)
지역이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강도 만난 자는 여행자가 아닌 두 곳을 근거 삼아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유다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쪽이 더 무게감이 있는 설명이 됩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두 번째 사람,세 번째 사람,그리고 네 번째 사람으로 등장하는 무대 인물들의 비교는 대단히 긴박한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두 번째 사람과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부한 선민의식이 투철했던 유다 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긴장감을 주는 오놀 본문에서 예수께서 드신 비유는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유다 인 들을 향해 포문을 열기에 충분했습니다. 31-32절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앞에서 언급한 하워드 먀샬은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간 일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제가 반대편 길로 피하여 지나간 것은 자기도 강도떼를 만날까봐 무서워 황급히 지나간 것이다. 레위인들은 사제보다는 약간 낮은 지위였지만 유다 사회에서 특권층에 있었던 종교 제사직 관리들이었다. 이들 역시 종교적인 금기 사항 때문에 강도만난 자를 피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상식적인 의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위의 책, 87-88) 이 해석에 제가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제사의식을 드리는 사역자 들이었기에 민수기 5:2절(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로 그들의 정당성을 변호하지만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해야 할 유대 율법의 지도자들로서의 상식을 저버린 행위라는 해석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렇게 강도 만난 내버려진 유다 인을 살핀 자가 4번째 인물이라는 사실은 예수께 질문하는 율법 교사들을 적지 않게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 인물은 원래 유다 땅에 잘 내려오지 않는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짐승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내려온 이 사람은 아마도 삶의 본질적인 일 때문에 내려왔을 것입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삶의 궁극적인 그 무언가 때문에 기피하는 유다 땅에 발을 디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상상할 수 없는 호의를 강도 만난 자에게 베풉니다. 상처 부위를 기름으로 바르고,포도주를 부어 응급 소독과 조치를 한 뒤에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케어 했음을 누가가 적시했습니다. 본문 정황을 보면 하룻밤을 그와 같은 공간에 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헌신과 희생의 극치라는 물질적인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나를 전율하게 하는 장면은 35절이 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언젠가 한 번 메시지를 통해 말씀드린 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 주인에게 건넨 물질이 데나리온 둘이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데,통상 유다 땅에 있는 주막의 하루 숙박비가1/12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할 때2데나리온은 며칠은 주막에서 더 묵어도 되는 경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나친 비용을 지불한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놀라운 당부를 하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더 든 비용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일입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끝까지 환자를 책임지겠다는 행동의 선언이며, 더 든 비용을 책임지겠다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책임지겠다는 선언입니다. 백번 천 번 양보하여 이 두 가지 즉 두 데나리온 지급,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종교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행이라고 전제할 때 도무지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보이는데 이 부분입니다. ‘additional charge’ 입니다. 이 단어를 개역 판 성경은 ‘부비(附費)’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근래 사용하는 말로 번역하면 ‘추가요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 토로가 내 마음을 강타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단히 부담스럽겠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 수준이 바로 이 수준이라는 것을 부인할 없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단언합니까? 본문 마지막 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베푼 자비와 사랑의 비유를 드신 주께서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카운터펀치를 맞은 율법교사는 유대 종교인의 자존심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예수님이 사용한 단어를 끝까지 쓰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지칭을 에둘렀습니다. 이 질 나쁜 저의를 보고 본문 마지막 절 후반절에서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단지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선을 베푼 정도가 아닌 이 일을 삶으로 지속하는 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 인들이 감당해야 할 상식이라는 점에 눈이 번쩍 뜨이는 새해 첫 주 주일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세인교회 2023년 표어의 근거 구절을 지금까지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을 존중하는 세인 교회가 첫 주일에 심비에 새겨야하는 레마를 설정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상식을 존중하며 산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 ‘누구에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사랑을 보여주었는가?’에 답하는 삶입니다. 이 레마를 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상식을 존중하며 산다는 것은 ‘이즘’(-ism)론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내 현장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삶을 살아내는(to do)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additional charge’를 분석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additional charge’를 내놓은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머리로 산 사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제사장, 레위인들은 철저하게 머리로 계산 하여 자신들에게 미칠 불이익을 주판알을 튕긴 뒤, 사라져 버린 자들이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당연히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을 불을 보듯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담감을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식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식은 하나님의 정하신 선을 지키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식은 내가 정의한 대로 굴러가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스케줄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몇 해 전, 읽었던 ‘상식이 통하는 목사’에서 저자가 전한 벼락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 전에 떨고,설교 후에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목사는 매 주일,한평생 이 영혼의 그네 타기를 반복하는 자다.이 외로운 싸움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로지 그만이 감당해야 하는 고독한 투쟁이다. 이것이 목사의 소명이자, 숙명이다.” (김요한, “상식이 통하는 목사”, 새물결플러스, p,42.) 김요한 목사의 이 글을 절절하게 받은 이유는 나 역시 목사로 살면서 이 투쟁이 없이 작금의 시대에 목사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가 이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additional charge’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목사가 이 치열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성도도 마땅히 ‘additional charge’를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얄팍하게 머리 굴리는 삶으로는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상식은 본문에 등장한 네 번째 사람이 내놓은 ‘additional charge’를 내 삶의 자리 에서 똑같이 내놓는 삶입니다. 이것을 중요한 삶의 내용으로 선포하셨던 주님이시기에 율법 교사들에게 이렇게 강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결론) 작년 11월에 2023년 세인교회의 표어를 생각했습니다. ‘상식을 존중히 여기는 교회’ 그리고 이 표어를 12월 초에 공개했습니다. 지인들이 이렇게 피드백을 해 주었습니다. “참 마음에 닿는 표어예요. 표어를 실천하는 성도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에게 인정받는 세인교회! 참 좋습니다.” “어느 놈은 공정과 상식을 말하면서 실제 하는 짓은..., 그러나 여전히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곳 바로 세인이 있으니 희망을 본다.”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 너무 와 닿는 표어네요.” “감사합니다. 너무나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세간이 주목하는 것은 세인교회가 표어로만 그치는 2023년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공동체를 통하여 상식이 존중되는 일들이 편만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2023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루어낸 주님의 기뻐하셨던 상식적 가치를 기필코 이루어내는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가 620장 3절을 찬양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사랑받는 주의 자녀라 주께서 뜻하신바 우리 통해 펼치신다 고통과 슬픔 중에 더욱 주님 의지하오니 어려움 이겨내고 주님 더욱 찬양하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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