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뭐 이래! 하는 교우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목은 이래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정했습니다. 요즈음에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즐거운 비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여타 다른 교회 홈페이지에 비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는 책 소개와 그에 따른 서평의 내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서평의 내용이 많이 링크된다는 것은 그 교회의 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기에 담임목사는 마음이 흡족합니다. 더군다나 친구 목사의 지속적인 독서에 대한 정보를 홈페이지에서 독려하는 것도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의 입장에서는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 올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읽자니 벅차고, 안 읽자니 마음에 부담이 있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토저(TOZER)가 쓴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라는 책을 종이 소개했습니다. 종이 소개하는 책은 양서(良書) 중에 양서로 선별된 책들입니다. 그러기에 지체들이 꼭 한 번 접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소개를 하는 책들입니다. 토저의 책이 바로 그런 책 중의 하나입니다.
책을 소개 한 이후의 후일담이 지난 주간 몇 몇 젊은 여집사님들을 통해 회자되어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종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렇습니다. 담임목사가 소개한 토저의 이름을 주보에 '아이든 토저'라고 소개를 했는데 이 이름이 사단이 난 것입니다. 이미 토저를 알고 있는 집사님은 에이든 토저라고 알고 있었고 저는 아이든 토저라고 소개를 했기에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동일인인가? 에 대한 진지한 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결론이 나오지를 않자 자세히 알아보고 전화로 함께 나눈 대화의 끝은 동일인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자니 재미가 있었습니다. 왜요?
"아이든이면 어떻고 에이든이면 어떻고 어이든이면 어떤가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재미만 느낀 것은 아닙니다. 재미보다는 감동이 더 컸습니다. 담임목사가 소개한 책에 대한 집중력을 집사님들을 통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집중력이라면 토저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갈파한 습관적인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권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겠습니까?
미국식 발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국식 발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토저의 middle name이 윌슨 (wilson)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재론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광야의 외치는 소리와 같이 불의 혀를 토해낸 영적인 감동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결코 이성을 무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도리어 바울이 로마서 8:18절에서 말한 대로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영성과 더불어 지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들의 신앙 선배들의 외침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소그룹에서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고 있습니다. 성경통독반에서는 성경과 더불어 기독교의 불후의 고전인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읽고 있습니다. 가장 젊은 소그룹은 '본회퍼'를 읽고 있습니다. 개강되는 크로스웨이 3기반도 필독도서를 읽게 될 것입니다. 종은 지금 개혁신학의 주인공들인 존 파이퍼, 존 맥아더, 마이클 호튼에 이어 이안 머리와 데이비드 웰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종이 바라는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 세인지체들이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실력 있는 우리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사순절 기간의 복판에 있는 우리 세인의 지체들이 가능하면 신앙 선배들이 남긴 족적들을 손에 들고 독서하는 기간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겨례 신문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홍세화씨가 쓴 '생각의 좌표'를 읽다가 가슴에 남는 대목이 있어 밑줄을 그었습니다.
"사람은 그 때까지가 읽은 책이다." 가슴에 새기는 우리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