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숭늉 구하기 “고요히 앉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과 같다.” (김기석, 아슬아슬한 희망 p,71) 저자는 사유함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지를 고변한 것이다. 더불어 이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현대인들의 참 아픈 비극은 무리지음이다. 무리지음은 내 스스로가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반향이리라. 그렇지만 그 몸부림의 반향은 나를 더욱 외롭게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서늘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지음이 아니라 홀로됨이라는 역설이다. 저자는 책에서 외로움과 고독은 양면의 날과 같은 것임을 신학자 폴 틸리히의 지론으로 소개한다. “‘외로움’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데에서 오는 ‘홀로 있음의 고통’이지만, ‘고독’은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됨의 희열을 누리는 ‘홀로 있음’의 영광이다.”(p,73) 저자가 소개한 폴 틸리히의 갈파에 상당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인가? 무리지음이라는 몸부림에는 결코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마치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 아니겠는가? 생거먼 대학 학장으로 일하면서 개발된 문명에 도전하던 깨어 있는 지식인 리 호이나키는 일리노이 주의 농촌으로 돌아와 그가 꿈꾸던 생태주의적인 세계를 그리며 살던 나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상적으로 마음을 분산시키는 현대적 미디어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자유롭게 사색했다. 직업상의 불가결한 구성부분으로 독서를 하는 생활을 포기한 후에 나는 이런 삶의 독서를 했다. ‘오늘날 육화된 독서는 어떤 것인가? 아직도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는 거리와 여유를 발견하였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p,147) 호이나키가 이런 통쾌한 성찰을 할 수 있었던 근원이 어디에 있었을까? 그의 말대로 그가 선택한 곳은 현대적 미디어가 전혀 없는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환경이었기에 오히려 그곳에서의 고독함이 자기 존재의 근원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결과 그는 후대의 생각하는 지식인들에게 삶으로 실천하는 깨어 있는 지성적 교훈들을 남겨준 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시대의 비극은 분주함이다. 더불어 전혀 내적인 감동과는 관계없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나와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아니라 고독함을 경계하게 하는 시끄러움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서 스스로의 경책을 갖지 않는 한, 우리들 스스로는 매 번 우물에서 숭늉 찾는 어처구니없는 사유함이 없는 일을 자행할 것이 분명하기에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