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류호준 교수의 문예신학적 에세이32024-03-27 11:17
작성자 Level 10

구약의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표현력으로

재구성한 문예 신학적 에세이!

 

"누가 좋은 작가인가? 누가 진지한 작가인가? 누가 좋은 설교자인가? 아니, 누가 진지한 설교자인가?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의 가슴을 열어 주고, 우리의 가슴을 열어 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열어 주거나 우리의 가슴을 열어 주어 그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도록 해 준 이들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좋은 작가와 좋은 설교자는 매우 가까운 이웃입니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위에서 정의대로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애쓰는 한 목사의 설교들과 묵상들입니다.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가슴을 열어 느끼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렵풋하게 나마 알아가고 있는 한 설교자의 발자국들이 여기 저기에 보이기를 소망합니다."

-서문중에서 

 
서문 - 천성의 선물 두 손에 들고
프롤로그 - 설교와 설교자

1. 창조- 하나님은 바다괴물도 창조하셨습니다
2. 소명- 축복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들
3. 선택- 하나님의 선택은 이야기입니다
4. 전복-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시는가
5. 축복-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
6. 부르심- 공중에는 부르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7. 기적- 기적은 일어나는가
8. 영광- 광야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광
9. 갈망-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
10. 은혜- 은혜로 가득 찬 룻
11. 청력- 한밤중에 들려온 목소리
12. 환상- 왜 교회에 가는가
13. 예배-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기묘 -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15. 복음- 내 백성을 위로하라
16. 십자가 - 모든 우상을 폐위시키십시오
17. 모순 - 부조리 속에 거하시는하나님
18. 찬양-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19. 기도- 지옥에서 드리는 시편
20. 신앙 -법정에 선 하나님
21. 시간- 시간을 구원하라

에필로그
 
류호준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산문의 세계'를 초월하여 창조적이고 함축적인 '시의 세계'로 뛰어든 설교자. 이 때문에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독자의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의 책들은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린 맑고 시원한 샘물처럼 딱딱한 신학적 내용을 '문예ㆍ신학적 에세이'라는 장르로 담아내고 있다. 그렇기에 감동은 더 진하다. 그는 ‘설교자란 하나님 마음을 읽는 사람’ 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목사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문서사역자로서 가랑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로 적시게 한다. 미국 칼빈 신학대학원(M, Div., Th. M.)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Dr. Theol.)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기독개혁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류 교수는, 교단과 강단의 접목에 큰 관심을 두는 성경학자요 설교자라 할 수 있다. 현재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장 및 기독신학대학원의 구약학 교수이며 평촌 무지개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섬기고 있다. Zephaniah's Oracles Against The Nations를 비롯해 <아모스 : 시온에서 사자가 부르짖을 때>, <정의와 평화가 포옹할 때까지>, <장막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천상의 노래가 되어> 등 다수의 저서와 <구약신학>, <개혁주의 인간론>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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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
(출 33:12-23) 구약신학 - 류 호 준 교수


여행 때는 지도가 필요하다.
지도가 있으면 목적지를 정확히 갈 수 있다.
목적지는 영적인 가이드다.
성경에서 지혜는 길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광야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장소가 광야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이냐, 이방인이냐 결정하는 중요한 곳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율법을 주셨다.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서 이방인들이요, 외국인들이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나그네(客)이며 임시 체류자(sojourner)들이다.
이 세상은 그들에게 타향이다.
크리스천들은 나그네이다. 어디론가 이동하여 가는 사람들이다.
'길'위에 있는 사람들이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다.
나그네로 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art)이다.
무엇이 나그네로 사는 예술이란 말인가? 그 예술은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방황하기에 너무도 적절한 광야에서 나그네가 가져야 할 삶의 예술은 길을 분별하고 길을 찾는 것이다.
나그네로 사는 데는 '비밀'(secret)이 있다.
그가 풀어야할 비밀은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그네로 사는 일에는 '지혜'(wisdom)가 있어야 한다.
그가 가져야할 참 지혜는 마치 한 시인이 기도하듯이 기도하는 일이다.
"오 주님, 나로 당신의 길들을 알게 하여 주소서. 나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시 25:4)
모세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나그네였다.
그는 하나님께 요청했다. "저에게 당신의 길들을 보여 주소서."

"저에게 당신의 길들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모세는 기도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 길들을 네게 보여 줄 수 없다. 그 대신 나의 현존(現存, presence)이 너와 함께 갈 것이다.
미래에 대한 시사회를 너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 대신 나의 임재(臨齋)가 너와 동행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약속을 네게 주는 것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두 번째 요청을 드린다.
<첫 번째 요청은 그에게 하나님의 '길'(道)들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두 번째 요청은,
나에게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보여주십시오! (출 33:18)
나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십시오!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도록 해주십시오!
나에게 하나님의 영화를 보여 주십시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네게 나의 영광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내 모든 선(善)함으로 네 앞으로 지나가게는 할 것이다.
내 현존을 네게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현존의 흔적을 뒤에 남겨 놓을 것이다.
내 임재를 네게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발자국과 손자국을 뒤에 남겨 놓겠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방식이 있다.
과거에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함으로써 이다.
당신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이다.
당신의 삶 속에 난 하나님의 손자국과 발자국을 찾아봄으로써 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세 번째 요청을 한다.
그가 한 첫 번째 요청은, 나에게 당신의 '길들'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한 두 번째 요청은, 나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한 세 번째 요청은, 나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너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보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딤전 6:16)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그들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보면 죽게되는 사람들, 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아무도 나를 보고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는 내 등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오직 뒤에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뒤돌아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면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너는 나의 현존의 후광(後光)만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오직 나의 발자국, 손자국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로 분주하게 일하실 때, 그분의 손은 우리의 눈을 가리우신다.
그러나 일이 끝났을 때 하나님의 우리의 눈을 가리웠던 자신의 손을 거두신다.

바로 그때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뒤돌아 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뒤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회고적(回顧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뒷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황혼(黃昏)과 일몰(日沒)
푸른 삶의 신비를 지닌 나무들
별은 이미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광년 걸려 우리에게 오고 있는 별빛들
온 우주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삶과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셨는가를 바라볼 수 없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며 깊이 아쉬워하고 부끄러워 할 때가 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분명히 그 때 그 분이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뒷모습들은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얼굴과 얼굴을 보듯 하나님을 만나 보기를 바라는 영혼의 갈망과 목마름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나의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渴急)하나이다.
내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데,
내가 언제나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인가? (시 42장)
시인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만이 진정으로 영혼에 만족을 준다는 사실 말이다.
어느 때인가 우리는 우리의 삶의 피부에 닿아오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어느 때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뵙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야웨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 위에 비추시고
야웨께서 그의 '낯'을 우리를 향하여 드시고
야웨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충만히 만족시킬 비전(vision)을 주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면 어디를 쳐다보아야 하는가?
어디 곳을 쳐다보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디인가? 여러분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얼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