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투표 당일에 저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시무권사 영성 수련회를 마치고 몹시 피곤한 심신이었지만 아들에게서 날아온 문자 메시지도 있고 해서 남당 초등학교로 발걸음을 아내와 함께 옮겼습니다. 7명의 사람과 한 정당에게 투표를 해야 하는 헷갈리는 투표였지만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이념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람과 정당에 정확하게 기표를 하고 나왔습니다. 이번 선거는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는 정부 여당 쪽에 많은 유리한 프리미엄적인 요소들이 있었던 선거였습니다. 그러기에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판가름이 날 것이라고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정각 6시에 방송 3사들을 통하여 보도된 출구조사를 보면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해보나마나 한 선거라고 예측했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고 보아도 무색할 정도의 출구 조사였기 때문입니다. 선거 다음날 방송사를 통해 보도된 내용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고 지금 정치권은 엄청난 충격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받아보는 신문 사설을 보았습니다. 다각도로 분석한 예리하고 냉철한 논설을 접하는 어간,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야당인 민주당이 잘해서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소통 부재의 정부 여당의 고집스러운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으로 균형 잡힌 유권자들의 높은 수준이 나타난 선거였다."
이 문구를 보다가 갑자기 목사로서의 의식이 발동되었습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을 목양하는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문단의 한 구절이 절절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균형 잡힌 유권자들의 높은 수준'
종도 요즈음에 위의 문구 중에 한 단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균형 잡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국적인 신학의 영역은 아주 학문적으로 빈약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의 수준이 지적으로 나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한국교회의 영적인 흐름이 감정적인 부분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른바 신비주의적이고 감정적인 흐름이 주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신앙의 기형적인 형태로 자라난 것이 한국교회를 약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이원론적인 비성서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되어 오늘에 이르러 교회가 세상에서 지금처럼 몰매를 맞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종이 요즈음은 걱정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적인 신학은 전 세계를 석권할 정도의 비약적 발전을 이룰 정도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그 만큼 질적인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이제는 한국교회 내에 지적인 레벨-업(LEVEL-UP)이 이루어진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동안 무시해 왔던 삶과 신앙을 유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신행일치의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삶만을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신앙의 합리화를 빙자한 극단적 신앙이기주의입니다. 예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며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선언하신 최대의 메시지는 '자기부인'(SELF-DENIAL)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부인', '자기희생'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이것이 현대적인 크리스천들의 치명적인 이기성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무식해도, 지적이지는 않아도 교회에서의 헌신과 희생을 기뻐한 것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교회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느끼는 자괴감이 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주님의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라는 권면에 부합하는 현대적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띠게 줄어들고 있다는 자괴감입니다. 지난 주간 담임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한 지체가 고백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무엇일까를 내내 가슴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은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지체들을 만드는 것은 힘이 든 목양의 여정인 것이 분명하지만 종은 인내하며 이들을 만들어내며 이들과 함께 하는 목양의 항해를 하렵니다. 지방 선거 투표에서 종은 또 다른 목회적 교훈을 얻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