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베풂과 용서-미로슬라브 볼프[강추]2024-03-27 11:17
작성자 Level 10

베풂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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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oslav Volf

1. 불쾌한 압박과 유쾌한 연주

중학교 때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당시 기타를 치는 것은 남자로써 영웅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기타를 무료로 그것도 음대 출신의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최고의 특권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타를 사고, 연주하고 싶은 악보들도 여럿 샀다. 그리고 처음으로 기타를 배운 순간 거의 실신하고 싶은 정도였다. 기타 줄을 팅겨서 연주하기는커녕 앉는 자세와 기본적인 음계를 배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다음 시간이었다. 처음 시간에 배운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달동안 기본 코드를 잡는 것으로 시간은 흘러갔다. 책상위에 놓여진 악보집은 먼지만 쌓여갔다. 그리고 왼손가락의 끝마디가 물집이 잡혀서 너무 괴로웠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시만 하셨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까 코드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잡히고, 손가락 끝마디는 단단한 굳은 살이 생겨서 2시간을 연주해도 아파오지 않았다. 맨처음 기타를 배우는 매순간 순간은 불쾌한 압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압박이후에 나에게 남은 것은 유쾌한 연주였다.

“베풂과 용서”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불편한 압박인지 모른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있는 것을 베푼다는 것, 내게 피해를 준 이를 향하여 용서를 한다는 것.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등장한 여인을 봐도 그렇다. 보스니아 출신의 교사인 무슬림 여성은 세르비아 사람들은 내게 증오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고통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오직 증오만 있을 뿐이다. 학생들에게 사랑을 가르쳤어도, 문학을 가르쳤지만 내 이웃이자 제자가 자기 입에 방뇨를 했으며, 구타를 당한 것이진 기절을 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하루 하루의 연속이었으며, 나중에 고통이 무감각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여인에게 세르비아 사람을 용서하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압박 속에서 유쾌한 연주가 이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또 다른 삶을 인도할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리코스시사의 주민들은 7년마다 그리스도의 수난극을 재연한다. 마을의 원로들이 1년 전에 미리 연극의 배역을 소화할 배우들을 선정하면, 사제는 그 배우들에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각자 맡은 배역을 연습하라고 다그친다. 그 배우들은 요한이나 야곱, 막달라 마리아나 예수의 역을 맡아 연습한다. 그 결과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그리스도의 역을 맡아 연기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 카랄람비스라는 재산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마놀리오스는 가난한 난민집단을 들어가서 평생을 봉사한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그들은 변화된 것이었다. 불쾌한 압박은 다음 우리를 분명히 유쾌한 연주로 이끌어갈 것이다.

 

2. 3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

하루는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만원인 것이다. 그럴 때 자리에 앉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다. 그런데 바로 내 앞자리에 자리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앉으려 하자 갑자기 “잠깐”하면서 가방이 날라오는 것이 아닌가! 옆에 옆에 계셨던 한 아주머니가 가방을 던져서 자리를 맡고 앉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아침부터 받았던 은혜가 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의문이 생겼다. ‘아니 하나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아주머니를 보고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저 사람이 너의 어머니가 아닌 것을 감사해라 ’ 맞았다. 저런 사람이 내 어머니였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쁨과 감사가 넘쳐서 언제 집에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2각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3각관계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베풀라고 하지 않으신다. 내가 너에게 베풀었으니 너희도 베풀라고 하신다. 내가 용서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즉 우리는 하는 것이 아니다. 받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형은 어릴적 다니엘 형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을 주변에 있는 군인 자기 형을 부식 운반용 마차에 태우고 가다가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 45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단 한번도 유모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을 돌보기로 되어 있던 유모가 형과 자기를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말이다. 더욱이 법정에 서서 그 군인을 풀어달라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군인은 둘째치고 군대를 향하여 고소해도 평생 살 보상금을 받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사냐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정확히 말했다고 한다. “주님이 용서했는데 내가 왜 용서하면 안되느냐?” 우리가 용서해야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이 내게 행한 것을 바라볼 뿐이다.

다시 한번 세리가 성전 끝에 서서 고개 숙여 탄식하는 모습이 내게는 아직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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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우리가 잃은 것에 대해 저자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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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의 그 사람, ‘용서’했습니까?

-미로슬라브 볼프, 『베풂과 용서』-

 

‘용서’라는 단어는 딱 떨어지는 말이다.

완전하고 깔끔하고 그것으로 끝, 그런 이미지를 주는 말이 용서이다. 그러나 ‘용서’라는 말을 떠올릴 때, 한두 사람과 얽힌 미완의,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정서를 확인하게 되는 것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의 가르침, 이를테면 “일곱 번을 일흔 번”같은 비유를 포함하여 많은 용서의 지침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해를 보고, 배신을 당하며, 상처 받는 실제 상황 속에서 용서의 계명은, 단언컨대 결코 쉽지 않다.

예일대 교수인 크로아티아 태생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가 이렇게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용서의 문제와 베풂의 문제를 고통스러운 가족사와 영성 깊은 신학의 토대 위에서 풀어낸 것이 『베풂과 용서』이다.

대중문화는 용서를 “노여움 및 분노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으로…스스로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신들이 침해를 당해 빠지게 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용서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하여 저자는 말한다.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치유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용서는 우리가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용서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지적한다. 예를 들면 “용서하겠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같은 것들. 나약하고 이기적인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을 시종일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서 찾는 성경적인 해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신뢰가 간다.

 

고의가 아닌 잘못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의도적으로 저지른 잘못은 용서할 수 없다?

작은 잘못은 용서할 수 있어도 끔찍한 잘못은 용서할 수 없다?

한 번 잘못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잘못을 되풀이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잠정적으로 그러하다고 동의하는 부분들에 대해 성경적이며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저자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그리하여 용서에 대한 저자의 깊고 폭넓은 인식의 사유는 “용서가 지나친 교만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용서하다가, 용서를 받아야 할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잘못 용서할” 가능성이 있다는, 새로운 차원도 접하게 된다.

용서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던 어떤 목사님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래서 다음 구절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된 힘을 끄집어내어 용서를 억압하고, 우리의 분노를 키우고, 가해자들을 단죄하고, 그들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고, 복수를 꿈꾸고, 복수의 힘이 우리의 혈맥을 통해 들끓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용서하려면, 그 모든 힘과 교만을 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