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윌라드의 『잊혀진 제자도』_복 있는 사람
제자도는 사람이다 달라스 윌라드의 이름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박사학위 과정의 세미나 시간이었다. 과목은 “종교 인식론”이었는데, 무신론, 신앙주의, 개혁주의 인식론, 자연 신학, 파스칼의 내기 이론, 종교 경험 등을 다루었다.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 그러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를 두고 벌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찬반 논의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텍스트는 그것들과 관련된 여러 논문을 편집한 것이었고, 수업은 그 논문들을 차례로 읽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때 윌라드는 The Three-Stage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풀이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세 단계의 논증이라는 글의 저자였다. 첫 단계는 물질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다음은 세계는 진화가 아니라 설계(design)로 해명될 수 있다는 것, 마지막은 지적인 설계자나 초자연주의에 의해서만 인간의 필요가 충족되고, 설명된다는 논지의 글이었다. 신앙이 인격적 신뢰와 모험의 측면을 포함하더라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이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모략』이나 『마음의 혁신』의 저자라니. 한 사람이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요 탁월한 영성작가라는 것이 내게 그리 어울릴 법한 조합이 아니었던 모양이니 나에게도 지성과 영성을 서로 다른 종류의 것으로 인식하는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다. 청교도들이 목회와 학문을 겸비한 이들을 성학(聖學, Divines)이라고 불렀고, 실제 그런 분들이 많았다. 루터는 매일 세 시간 기도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로 100일에 한 권꼴로 저술했다지 않는가. 본받아야 할 이상이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내 생각에 두 가지에서 연유한다. 하나는 그의 신앙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다른 무엇보다도 스승으로 신앙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서 누락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분이 정녕 주라고 고백한다면, 학문과 지성의 영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다른 면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그런 존재일 수 있는 그분이 어떻게 지식과 지성에서는 만민 중에 으뜸이 될 수 없단 말인가?”(43쪽) 해서, 예수는 “적절한 논리의 도구를 가지고 지성적인 일을 하는 분”이자 “사상가”요, “역사상 최고의 지성인”(249쪽)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윌라드 자신이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일급 철학자다. 그는 시간의 대부분을 철학하는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다.(78쪽) 그런 그의 눈으로 보니 예수는 단연 “신앙과 학문의 통합”(248쪽)의 전범이요, 논리학자다. 그분의 논리는 예컨대, 현대 논리학의 대가들인 비트겐슈타인이나 프레게를 능가한다. 지성 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은 하나의 금기인데도 예수를 일컬어 논리학자(14장)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단언하는 것도 그가 그런 말을 할 만한 학자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논리학자의 눈에는 예수도 논리학자다.
제자는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의 어떠어떠함과 무관할 수 없다. 예수님은 바울은 바울답게 이방인에게로, 베드로는 베드로에게 알맞게 유대인에게 보내신다. 마가는 어부 베드로를 통해서 새벽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예수를 본다. 의사 누가는 밤늦도록 기도하는 예수를 본다. 그래서 제자도는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제자 훈련한답시고 그리스도도 아니고, 각인의 고유성을 뭉개면서 지도자를 생각 없이 모방하게 한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자기 제자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다. 제자 훈련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된다. 윌라드를 윌라드답게 한다. 이것이 제자도에 관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교훈이다.
제자도는 성품이다
제자도가 사람이라는 명제는 제자도는 성품에 근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윌라드에 따르면, 예수의 혁명의 핵심은 성품 혁명에 있다.(『마음의 혁신』, 1장) 인간의 깊고 깊은 내면세계가 정돈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혁명도 공허하다. 제자 훈련은 우리의 표면만을 고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변혁적 능력을 함양한다. 예쁜 열매가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을 목표로 한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기 마련이니 좋은 나무가 되어가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아무리 계속 금식하고, 오래 기도하고, 많이 구제하여도 은밀한 곳, 곧 행동의 이면인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모든 훈련은 쥐어짜는 것이 된다.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사람 속에 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신앙과 외적인 행동의 동일시이다. 그것이 의의 일부인 것은 틀림없으나 본질과 하등 상관없다. 인간의 성품이라는 은밀하고도 숨은 차원에서 자연스레 흐른다. 제자 훈련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행동을 결정하는 사고와 감정과 성품의 변화이다. 그러기에 제자는 “나는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즉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나?”(39쪽)를 물어야 한다.
대답은 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문자적으로는 학생)로서 우리의 목표는 그분처럼 되기를 배우는 것이다.”(50쪽) 베드로의 표현을 사용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책이 아니라 공동체를 남겨두셨는가를 이해한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이야기를 살아내기는 제자 되기 원했던 것이다. 예수를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듯이, 제자를 경유하지 않고 예수를 알 길이 없다.
목회자로서 절실히 그리고 뼈아프게 느끼는 것은 교인들은 나의 말을 그리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눈짓, 손짓, 몸짓 하나를 두고두고 퍽이나 오래 기억한다. 실로 두렵다. 이를 조금만 확장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눈여겨본다.(178) 따라서 제자 훈련은 “스승 예수와 동행하는 가운데 그런 성품 특성들이 점차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안에 배어드는 과정이다.”(37쪽)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 예수의 성품이요, 자기도 모르게 타인이 눈치 챌 정도로 흘러 나간다. 내게 제자훈련이 여기저기에서 그러모은 성경의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성경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일러 준 것은 안이숙 사모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김동명 목사의 『용서받은 탕자』(요단)였다. 그는 제자 훈련의 요체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앎은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이다.”(19쪽) 제자훈련의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 아주 오래도록 품고 또 품어 절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임을 윌라드를 읽으면서 다시금 확인한다.
하지만 것은 우리가 모방해야 할 예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한두 군데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27쪽),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적어 두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것은 아마 그의 대표작인 『하나님의 모략』에서 “참된 부요를 누리는 자: 8복”(4장)과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5장)에 충분히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니 이점이 못내 아쉬우면 그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하여간에 제자도는 예수를 풍겨내는 성품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것이 윌라드가 우리더러 잊지 말라고 하는 두 번째 가르침이다.
제자도는 순종이다
최근 영성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그것이 생략하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찜찜하다. 영성은 피할 수 없는 대세지만, 그만큼 불확실하고 위험의 소지가 많다.(『마음의 혁신』, 27쪽) 삶 자체가 영적인 것이라면(29쪽), 모든 것이 영성이고, 그렇다면 그 어느 것도 영이 아닐 터. 사람들 마음 한구석이 텅 비고 허전한 것을 채우는 방편으로, 그것이 어떤 영인지를 불문곡직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간혹 들곤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가 없는 영성이란 아슬란 없는 바쿠스 제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루이스, 『캐스피언 왕자』, 시공주니어, 200쪽)
윌라드는 영성을 이렇게 규명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적인 일이다(요 3장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에는 본질상 영성이 내포된다.”(76쪽) 그리스도를 따름이 영성이고, 그것은 영성보다 훨씬 큰 개념이다. 여기에는 헨리 나우웬이 설명한 바, 하나님과 이웃, 자아라는 삼중적 관계가 포함된다(『영적 발돋움』, 두란노). 즉, 영적인 삶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고, 낯선 이를 따뜻하게 환대하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로 발돋움하는 삶이다.
하지만 “오늘 복음주의자들의 삶에서 빠진 부분은 일차적으로 영성이 아니라 순종이다. 우리는 순종을 본질로 치지 않는 변종 종교를 만들어냈다.”(74-75쪽) “순종하려는 의지는 그리스도 안의 영성이라는 기차를 끄는 기관차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진영에서 영성은 단순히 또 다른 차원의 기독교 소비주의가 되고 말았다.”(84쪽)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하나님과 나, 솔직히 말하면 오직 나만 존재하는 영성이 유행하는 듯하다. 이웃은 관심 밖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다름 아닌 순종이다. 제자도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름과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하여 우리는 본회퍼와 함께 단호히 말해야 한다. “순종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이다.”(『나를 따르라』, 41쪽) 왜냐하면 “은혜에 의해 순종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순종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31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윌라드는 본회퍼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제자도에서 영성과 순종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의 영성 개발은 그리스도께 명백히 순종하는 삶을 지향한다.”(110쪽) 예수에게 순종하는 삶을 지향하지 않는 일체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제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보이지 않는 영을 보이는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성 어거스틴이 주의 만찬을 일컬어 “비가시적 은혜의 가시적 형태”라고 하였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이 살과 피가 되는 육화와 십자가 사건 통해 구현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의 만찬이나 십자가, 세족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따름은 내 안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거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것은 그분께 순종하려는 의지에서 발동되며, 순종을 배우는 삶이 몸에 속속들이 배어야 가능하다.(102쪽)
하나님 나라는 우리 외부의 어떤 곳,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한 개인의 고독하고도 순진한 사적 내면에 임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웃과 나는 물론이거니와 자연도 통틀어 포함하는 생태적인 것이다. 이 총체적 관계를 포괄하는 것이 영성이며, 그 영성은 말과 혀보다는 손과 발로 갈고 닦아지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영에 거하는 자다. 『잊혀진 제자도』에서 학습하게 될 귀중한 세 번째 교훈은 제자도란 영성이며, 그 영성의 알맹이는 순종이라는 것이다.
제자도는 기독론이다
기독교 제자도는 기독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칼 바르트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하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금세 알 수 있다고 했다. 존 스토트는 말한다. “제자도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우리의 시력이 흐릴수록 제자도는 초라해집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보는 시력이 밝고 선명할수록 제자도도 풍부해집니다.”(『21세기 제자도』, 복 있는 사람, 11쪽) 여기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시작하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I.1.1.) 제자도란 기독론에 상응하는 것이며, 그 귀결이다.
제자의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 스승과의 관계, 더 정확히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나를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지, 또한 나는 누구의 제자인지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하나님의 모략』, 365쪽)이며, 따라서 인생을 사는 법을 누군가를 통해서 배운다. 우리는 어디에선가 기도를 배우는데, 홈쇼핑과 쇼핑몰, TV의 광고를 따라 기도하기 쉽다고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지적한다.(『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복 있는 사람, 31쪽)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세상의 제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윌라드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한 마디로 스승이다. 간단하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그분은 우리의 스승인 것은 자명하다. 스승 예수는 학문과 지성의 담론의 장에서도 배워야 할 스승이며, 우리의 내면과 삶의 영역에서는 성품을 본받아야 할 멘토이며,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도 실제적이고 명백하게 가르치시는 교사다.(3장) 문제는 우리가 그다지 그분을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스승으로 믿으면, 이 모든 곳에서 우리를 족히 가르치고도 남는다.
윌라드의 이러한 예수 이해는 마태복음의 기독론과 많이 닮아 있다. 마태의 기독론은 한 마디로 “선생이신 예수님”이다. “마태는 주어진 전승을 그의 의도대로 활용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권위 있는 선생으로 강조한다.”(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 161쪽) 구약의 토라와 연속하면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완성자가 예수님이다. 세계 만물은 권위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는 것을 마태는 이방인 백부장의 종 치유 사건과 산상수훈의 결말로 강조한다. 하여, “예수님은 다른 모든 랍비를 대체하는 ‘한 명의 선생’이 된다(23:8).”(162쪽)
마태복음이 윌라드의 근거요 배경이라는 징후는 곳곳에 널려 있다. 『하나님의 모략』은 거의 마태복음 해설에 가깝다 할 정도로 마태복음의 8복, 산상수훈, 주기도문과 제자 삼으라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예수는 스승으로 우리는 그분의 학생으로 묘사된다. 『마음의 혁신』은 바울이 말한 바, 새사람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존재의 전 차원이 - 여기에는 생각, 의지, 몸, 사회, 영혼 등을 모두 포괄한다. - 그리스도의 성품에 붙들리는 것(9쪽)을 설명하는데 모든 노력을 바치고 있다.
『잊혀진 제자도』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명령(Great Commission, 마 28:18-20)이 중대한 누락(Great Ommission, 13)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질타와 함께 실종된 제자도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초점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제자도에 있어서 성품의 변화를 강조하는 대목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강력하게 마태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교회 공동체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순종은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된다. “진정한 목표는 성품과 마음의 변화이다.”(헤이스, 166쪽)
마태복음에서 제자훈련은 성품 훈련이다. 순종과 행동은 성품에서 비롯된다. 외적 행동과 내적 성품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마태복음의 관점에서 행동은 외적인 표출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의 책들에 성구 색인을 만들어 넣는다면, 마태복음의 구절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제자됨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잣대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는가? 윌라드와 이 책을 참조하라. 윌라드의 질문과 대답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네 번째가 된다.
제자도는 훈련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면의 변화는 단시간에 종료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진지한 과정이 불가피하다”(100쪽)는 말이다. 우리가 뿌리 깊은 습관의 노예이므로 지속적인 훈련이 아니고서는 나쁜 습성은 사라지지 않는다.(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19쪽) 습관은 의지와 결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욕망의 고질화된 습관들을 의지력 하나만으로 극복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127쪽) 그런 것으로는 일시적인 성공은 맛볼지언정 뿌리를 잘라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작물을 가꾸는 농부와 같이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된다고 하는 것이다.(헨릭슨, 『훈련으로 되는 제자』, 네비게이토)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한 문장이 있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라 공로다. 공로는 태도이고 노력은 행동이다”(96쪽)는 말이다. 대략 찾아본 것만도 63, 96, 115, 121, 189, 231, 249쪽에 등장한다. 이는 그가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서 편집하느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17쪽), 그만큼 그가 강조한다는 증거다. 그는 한 마디 더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지적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은혜로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마비가 되었다.”(91-92쪽) 은혜로 마비되지 않기 위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기 위해서 계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126쪽)
하지만 훈련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따분하고 지겨운 뉘앙스를 풍긴다. 억지로, 마지못해 등과 같은 단어들이 훈련에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공부하는 학생은 비슷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풀어야 하고, 운동선수는 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재미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스도는 종노릇하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훈련은 다시 우리를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제자도에 있어서 최대의 유혹은 과정을 생략하려는 것이다.(89쪽) 우리 모범되신 예수님도 갓난아기로부터 어른이 되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쳤거늘 하물며 우리랴. 하지만 본회퍼는 참 자유는 훈련의 생략이 아니라 고된 훈련에 있다고 그의 시, “자유의 도상에 있는 정거장”에서 말한다. “자유를 찾아 떠나려거든, / 욕망과 너의 지체가 너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못하도록 / 너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는 일을 배우라. / 너의 영혼과 신체를 정결히 지키고, / 너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 자기를 복종시키고 순종하라. / 훈련 없이 자유의 비밀을 맛본 자는 없다.”(본회퍼, 『기독교윤리』, 대한기독교서회, 3쪽) 훈련 없이 제자 없다는 말이 옳듯이, 훈련 없이 자유가 없다는 말은 더 더욱 옳다.
내게 제자훈련이 “자유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종내에는 기쁨에 도달하는 관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은 리처드 포스터였다. 그는 기쁨이라는 단어로도 불만족스러웠는지, 축제(celebratio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닮고자 하는 자에게 훈련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향연이요, 훈련을 통해 가꾸어진 모습 또한 넘치는 기쁨의 찬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재배치하고 재교육해야 하고(『영적 훈련과 성장』, 131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214쪽)
이 훈련에서 제외되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신자가 제자다.(1장) 안타깝게도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은근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번지고 있다. 제자가 아닌 신자들로 북적거리는 현대 교회는 제자도를 귀찮은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2장)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그렇게 우려했던 ‘값싼 은혜’이다. 회개 없이도 죄의 용서가 선언되고, 십자가도 없고, 순종도 요구하지 않는 은혜 말이다.(『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25쪽) 은혜를 값싸게 여기는 우리가 “교회의 대 원수”(24쪽)라는 본회퍼의 말이 그리 과격하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제자다. 하기야 ‘그리스도인’이 신약에는 3번 나오지만, ‘제자’라는 말은 무려 269번이라는 점은 우리의 호칭과 정체는 분명하다. 은혜로 거듭나서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도를 잊어버린 우리에게, 제자 훈련의 삶에 뛰어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잊혀진 제자도』는 아주 유용한 지침서다. 제자 훈련을 열심히 하고도 무언가 아쉽고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래서 이래저래 다 안 되거든, 이 책과 윌라드를 펼쳐 보라. 아주 요긴한 사용설명서(18쪽)가 될 것이다.
김기현 l 목사는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담임목사이며, 종교철학과 영미현대신학을 전공하고(Ph. D.) 한동대와 경성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공격적 책읽기』가 있다.
----------- 출처 : 기독교 사상 2007년 5월호 잊혀진 제자도는 이 시대의 목회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해서 올려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