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교회 수요예배 단상을 섬기며 금 주 수요일, 타 교회 저녁집회 강사로 자리를 비우신 아버지 대신, 제천세인교회 수요예배에 말씀 선포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군 제대 후 첫 번째 사역의 첫 발을 내딛은 곳이자, 본인의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오신 성도님들의 신앙의 터전인 세인교회의 단상에 선다는 것은 매우 부담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만, 실로 패기 밖에 없었던 첫 사역지에서의 어수룩함이 그래도 시간이 흐른 만큼 한층 성장해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부담이 가중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셨던지, 아버지께서는 '신중한 건 좋지만, 잘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게 섬기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세인교회 성도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 수준이 상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담감이었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 듯 단에서 내려왔기에,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보단, 땀으로 범벅된 모습만 기억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에 서 있을 때만큼은 내 힘이 아닌 주님 주신 담대함으로 선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족하고 어수룩한 모습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후 은혜 받았다 인사해주시는 세인교회 지체들의 립 서비스도 감사했지만, 한 편으론 담임목사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으로 덕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요예배의 단상을 내려오며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되었습니다. 세인교회의 한 번의 설교를 준비할 때도 그랬지만 언제나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교회 대부분의 강대상 수준이 천박해져 가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가속화 시키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들의 빈약함의 민낯이다.' ‘성도의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이라는 말은 옛말이다. 성도들의 수준이 목회자들 상회한지 오래되었다.’ 서슬 퍼런 비판의 글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들을 마음에 두고, 매번 상기하려고 하는 것은, 실력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께서는 설교자로서 꼭 지켜야 하는 몇 가지의 계명(?)을 자주 이야기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1. 설교를 위하여 본문을 충분히 연구하라. 본문을 얼마나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가가 곧 설교자의 실력을 반증한다. 2. 설교를 원고로 준비하라. 원고 밖의 이야기를 함으로서 설교가 산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3. 원고를 암기하라. 회중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설교자는 회중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다. 4. 성령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구하라. 왜냐하면 설교는 세상의 연설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아버지께서 조언하신 것들을 나는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라고 자문하고 자답한다면 차마 ‘잘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도우심보다 나의 이성과 지식을 의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원고를 벗어나지 않으려 해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져 설교가 길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닌, 나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시키려 할 대가 얼마나 많은지.. 뿐 만 아니라 일일이 나열하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럽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갓 사역을 시작한 새끼전도사가 설교에 대하여 늘어놓는 이모저모의 이야기가 사실 얼마나 가당찮은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주보에 싣는 것 자체가 교만한 것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음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주보에 글을 쓰는 것은 이를 읽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언제든지 설교단을 천박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나’라는 사람의 끊임없는 다짐이자 보루입니다. 노력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기 싫어하는 그 욕망과 가능성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글로 남김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가끔 동기들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나중에 목회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면 꼭 와서 죽빵을 날려주렴. 정신 차리라고.” 이 글 역시 나를 향한 족쇄이자 죽빵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이탈하려 할 때마다 정신을 곧추세우는 것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