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는 것이 힘듭니다. 지난 주일에 고린도전서 강해를 근 2년 만에 마쳤습니다. 90번 째 설교를 할 때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지난 90번에 걸친 강해 설교 준비의 과정이 스쳐 지났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소홀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참 부끄러운 일인 것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으로는 나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서 조금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품는 것은 설교자만이 갖는 소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저는 목양 현장에서 유독이 강해에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옹고집을 부리며 달려온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진행하는 어간, 12-14장의 은사에 대한 기록들을 해석할 때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유리함을 경험한 한국교회라는 텃밭은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은사를 추구하는 경향이 농후한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사도행전적인 은사는 이미 사도행전의 시대를 끝으로 오늘의 시대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 또 다른 이성적인 신자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우리 교회의 지체들에게 균형을 잃지 않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정말로 피를 말리는 내적 싸움이 고린도전서 강해를 진행하는 내내 저에게 있었습니다. 더불어 고린도교회라는 주후 1세기에 존재했던 로컬 처치가 갖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점들을 직시하며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했던 것도 종에게는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유는 여타 다른 지역 교회에 해가 되지 않게 전해야 하는 공예배적인 부담감이 저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년을 고린도전서와 씨름하다보니 검은 머리가 많았던 2년 전보다 지금은 훨씬 더 흰 머리가 많아졌습니다. 실은 이어서 고린도후서를 연속 강해해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기에 한 주간도 갈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혔습니다. 몇 달은 제목 설교로 한숨을 돌리기로 말입니다. 욥기 강해의 부담이 있는 데 연이어 강해 설교를 주일에 행하는 것이 너무 박차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해서 제목 설교로 숨 돌리기를 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제목 설교를 행하는 것이 쉽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해진 텍스트에 목 매이는 것만큼은 당분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이 즈음에 더 솔직히 말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근래 설교하기가 무섭습니다. 주일에 예배당에 앉아 있는 지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팔짱을 끼고 P,T, 포사이스가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말한 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위다.’라고 시위하며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두렵고 힘이 듭니다. “어디 한 번 나를 감동시켜 봐라.” 그럼에도 종이 근래 자꾸만 두렵고 떨리는 것은 성도들이 나를 감동시켜보라는 압박보다 나이 탓인지, 상처 탓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그 동안 민감하게 주셨던 감동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 하나님께 제일 많이 기도하는 제목이 ‘회복’입니다. 교우들에게 부탁합니다.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많이 힘이 들거든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