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7:4-8 제목 : 조건이 아닌 은혜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선별되는 기사입니다. 지난 호에서 살폈지만 하나님은 135,000명의 미디안 군대와 싸울 용사들을 모집함에 있어서 군사적인 이론으로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방법을 택하셨음을 주지했습니다. 자원한 용사 32,000명 중에 22,000명을 돌려보내신 것이 첫 번째 단계였고, 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단계를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투에 참여한 기드온과 그의 병사들을 보시고 기드온에게 뜻밖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모여든 32,000명은 전투에 나가는 인원으로는 너무 많으니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오합지졸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결과 무려 22,000명이 전쟁의 두려움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135,000명이라는 막강한 미디안 대군과 싸워야 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남은 군사 인원은 이제 10,000명이 고작이었습니다. 10,000명의 훈련 받지 못한 급조된 이스라엘 군사들이 정예화 된 135,000명의 미디안 군사들과 싸우는 것에 대하여 기드온 스스로도 두려웠고, 남은 10,000명 역시 두려웠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에게 또 다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을 하달하셨습니다. 10,000명도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더 줄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미디안과의 싸움에 나갈 사람을 가려내는 시험을 내시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미디안 출정 참가 군사를 뽑는 최종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에 나오는 물가 테스트였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본문 5-6절에 바로 하나님의 그 선별 방법이 나옵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을 핥으며 먹는 자는 300명은 합격, 무릎을 꿇고 먹은 자 9,700명은 불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테스트 후의 결정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정하신 합격, 불합격의 기준이 무엇인가? 의 심사숙고 말입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답은 하나님 맘대로 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필자의 이 성서 해석의 접근에 대하여 말 같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으신 독자들이 있을 줄 압니다. 이해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본문 해석을 맡은 필자가 토로할 수 있는 정직한 고백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 같지 않은 대목에서는 필자는 대단히 중요한 감동을 받으니 아이러니입니다. 어떤 은혜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식(式)은 언제나 조건이 아니라 은혜라는 감동입니다. 하나님 맘대로 라는 말은 하나님이 고집불통의 존재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사의 조건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하는 방식은 언제나 기승전결 그리고 서론, 본론, 결론의 분명한 형식이 있습니다. 이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식함으로 공격 받습니다. 반대로 이 형식에 걸 맞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지성적 신앙이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적 그리스도인들이 택해야 할 식(式)이라고 종용받습니다. 비이성적, 비상식적인 신앙의 행태에 대하여는 필자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극단적 열광주의, 편파적 신비주의 그리고 보이는 은사주의 등등에 대하여 주목하며 경계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제한하려는 지적 우선주의, 주지주의, 이성주의에 대한 경계심에서도 결코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위젤이 쓴 ‘팔티엘의 비망록(원제: The Testament)’을 보면 아들 그리샤가 아버지 팔티엘 거쇼노비치에게 어려서 배운 일을 독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공산주의자들) 볼세비즘, 멘세비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란 세 단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의(_ism)’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그건 혼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변덕스러운 여자 같은 거란다. 앞의 단어에 따라가는 거야”(p,63) 기막힌 성찰입니다. 그래서 아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적, 감정적, 의지적인 완벽한 조건이나 이즘(_ISM)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바울의 고백이 큰 울림으로 항상 공명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 있지만 독자들의 건강을 중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