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 어간, 공교롭게도 명절이 주일과 겹쳐지는 우연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은 그 동안 명절 당일을 고향에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명절이 주중에 있는 터라 살인적인 교통 정체라는 부담이 있었지만 명절을 형제들과 함께 나눈 적이 너무 오래인 것 같아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주의 종들은 평신도들과는 달리 시간적으로 그리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매일반인데 추석 명절 연휴가 경우에 따라 최장 9일까지 보낼 수 있는 넉넉함 때문이라서 그런지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간적인 부분의 여유로움을 갖고 고향에서, 처갓집에서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들과 해후를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때마다 많이 변하는 환경을 보면서 세월은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여정 속에서도 변함이 없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소천 이후 이전보다 조금 더 상태가 좋지 않으신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어머님, 언제나 저에게는 소녀 같은 자화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또 때로는 엄격한 학교 선생님 같았던 누님의 머리카락은 이번에 보니 검은 머리보다는 흰 머리가 훨씬 다 많아진 것을 보면서 당연한 이치이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의 감회가 밀려왔습니다. 큰 형님 역시 이제는 외탁을 한 우리 가족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머리가 된 것을 보면서 세월을 누가 막을까 하는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작은 형님과 대화하는 동안 퇴직 이후의 대비를 염려하는 것을 보면서 작은 형님의 나이도 이제는 오십 중반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카들이 이제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전에 티격태격하던 형님들과의 어린 시절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이 먹어감의 흔적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조금 있으면 며느리, 조카며느리들을 볼 것이고 또 조카사위도 볼 때가 오겠지요. 고향에서 홀로 남으신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치매투병 중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온전한 정신으로 계신 시간이 훨씬 더 많으신 어머님께서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막내아들 손잡으니 참 좋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말했던 옛 어르신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의 영육의 보존하심을 강하게 기도했습니다. 또한 고향을 다녀오면서 마음으로 다짐해보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명절에는 고향을 다녀오리라'
고향에서의 명절, 또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행복한 여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