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상한 감정의 치유2024-03-27 11:19
작성자 Level 10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비드 A. 시멘즈

이 책은 반드시 “상한 감정의 치유 워크북”(데이비드 시멘즈, 베스 펀크 편, 도서출판 예찬)를 함께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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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서문.........................

1. 상처난 감정들........................

2. 죄책감, 은혜, 그리고 빚진 것 거두어 들이기.............

3.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는 치료자

4. 사단의 치명적 무기

5.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1부).....................................

6.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2부).....................................

7. 완전주의의 증상들

8. 완전주의의 치료과정

9. 초인적 자신과 실제적 자신

10.우울증에 관한 오류와 진실

11. 우울증의 처리

12. 치유를 경험한 상담자들 

저자와 책에 대하여

데이빗 A. 씨맨즈:

인도에서 선교사 부모 밑에 출생했고, 자신도 16년간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 애즈베리, 드류, 하트포드대 에서 수학하고 지금은 애즈베리에서 목회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윌모어 연합 감리 교회에서 20년 동안 목회하고 있다.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갖고 있는 그는 [상한 감정의 치유][치유하시는 은혜] 등의 베스트셀러로 우리에게 친숙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이 책은

과거로부터 매였던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뜻에 비추어 쓰여졌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자신들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는 대신 성경말씀이나 신학적 용어나 혹은 비현실적인 전문 용어로 문제를 덮어 버린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그들의 생활 밑바닥에 깔리게 되어 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증세가 나타난다. 즉 병적증세, 이상한 행동, 불행한 결혼 생활, 심지어 자녀들에게 상처를 남겨 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 인물들의 태도나 감정들이 당신의 상태나 혹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와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여기에 나오는 인물이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다 살아있고 그들의 허락을 받고 그들의 이야기를 썼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공감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같은 필요와 열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서 문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발견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정규적인 교회 사역을 통하여 도움을 주지 못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문제는 설교를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또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이나 성령충만, 혹은 기도나 성례식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한 그룹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훈련을 시도했지만 결실을 얻지 못했다. 오래되고 망가진 레코드판을 틀었을 때 바늘이 한 자리에서 계속 머물러 있듯이 그들의 감정은 계속적인 패배감을 경험했다. 외적인 믿음의 표현으로 기도를 하고 헌금을 내고 죄를 자백하는 일은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더 깊은 회의와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어갔다.

다른 한 그룹의 사람들은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사람들은 그들 속에 있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자신들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문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성경 말씀이나, 신학적 용어나, 혹은 비현실적인 전문 용어로 문제를 덮어 버린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그들의 생활 밑 바닥에 깔리게 되어 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증세가 나타나게 된다. 즉 병적 증세나 이상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매우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녀들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남겨 주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사실이 있다. 즉 어떤 문제들은 일반적인 사역으로는 결코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눈을 열어 나 자신의 문제를 보게 하셨다. 또한 나의 결혼 생활과 자녀들과 친한 친구들을 통해서 상처를 싸매어주는 새로운 차원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목회 사역을 넓히셨다. 이제는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과거에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나의 사역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20년간이나 설교와 가르침과 상담을 하게 되었고 테잎도 배부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정서적 문제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던 과거의 상처들이 낫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상처난 감정들을 고치시는가를 이해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재생시키며 불구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상처가 낫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들로 변화하기를 기도한다.

 

윌모어, 켄터키, 감리교회 목사관에서 데이빗A. 씨맨즈

 

 

1. 상처난 감정이란 무엇인가?

 

가면을 쓴 것처럼 잘 감추어진 우리의 외적 모습 내면에 인생의 나이테가 기록이 되어 있다. 거기에는 오래된 아픈 상처가 남아 있고, 마음 속에 억눌려져 있던 기억들이 있다. 모든 기억들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대인관계의 영역 속에 직접적으로, 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력은 인생에 대한 것이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보는 태도에 나타나게 된다.

가장 공통된 감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데, 이러한 스타일을 몇가지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열등감:

계속적인 근심을 안고 있으며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나는 좋지 못해”라고 자신에게 늘 말하는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손상된 그의 내적 자아 속으로 깊이 침투하지 못한다. 그 깊은 부분도 역시 복음에 의해 변화되어야만 한다.

 

완전주의자:

“이것을 나는 절대로 제대로 성취할 수 없어. 나는 절대로 어떤 것을 만족할 만큼 잘하지 못해. 나는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내적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항상 찾아다니고 항상 애쓰지만 항상 죄의식을 느끼며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빠져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저것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좀 더 잘 해야 하는데,” 그는 계속 올라가지만 결코 목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에게는 자신의 완전주의적인 기질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바꾸어 적용시킨다.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한다며 끊임없이 자족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끊임없는 패배감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며 많은 칭찬을 받아도 충족감이 없다. 어떤 때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민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그 마음 속에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예민한 것을 대신 강인한 태도로 바꾸어 마음 속에 상처를 감추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받은 상처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두려움으로 가득찬 사람:

인생의 경주에서 대부분 실패한 경험이 많은 사람, 그래서 실패할까봐 두려워 많은 핑계거리를 만들며 자신을 안주시키려 한다. “나는 규칙들이 맘에 안들어” 혹은 “나는 심판이 못 마땅해.” “공이 둥글지가 않은데”,“골대가 삐뚤어졌어.”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항상 결정을 못내리니까 항상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신앙생활은 믿음은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전도하는 일은 어렵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삶을 시작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삶이란 거의 충격에 가까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결코 성취할 수가 없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패배를 경험하는 사람들이며 우유부단한 사람들이다.

 

복음은 이러한 여러가지 종류의 정서적 상처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줄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 모두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회 문에 자물쇠를 걸어 잠궈야 한다. 기독교는 더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우리가 외치는 ‘복음’도 더 이상 외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고치시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고치신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상처난 감정들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롬8:26) 말씀하고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와 상담자가 되시어 우리의 연약함을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이 일에 동참하시어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의 상처난 감정들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1.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기억하기조차 싫은 어린시절의 경험과 대면하라.

그것이 마음 속에 아무리 깊게 숨겨져 있다고 하더라고 상관 없다.

당신 자신이 먼저 그것을 시인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알게 하라.

어떤 문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백하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깊이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깊은 마음의 치료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2. 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손상된 감정을 절대로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3.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우리가 사는 현대는 자기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핑계대는 사람이 많다.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 한다.

 

4. 문제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과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자신들이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게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놓으신 것을 믿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바를 성경님께 구하라.

성령님께서는 어디를 두둘겨야 할지를 아신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잘못하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데이빗 벨굼 박사는 현재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중 75퍼센트가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환자들은 병이라는 도구로써 자신들을 스스로 학대하고 있으며 그들이 경험하는 신체적 증상과 문제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게 생긴 죄책감의 발로라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점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호의일 뿐 아니라 일을 해서 얻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은혜를 제대로 보고 알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도 행위와 일의 성취와 애써서 노력하는 것에만 급급하게 된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더 읽고 하루 기도 시간을 10분 더 연장하며, 나가서 전도도 하지만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그들이 소유한 구원은 약속어음에 의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나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상처를 입게 하는 만큼 우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못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든지, 용서를 한다든지 은혜를 베푸는 것도 못하게 된다.

이결과 우리는 대인관계에서 실패하게 된다. 또한 우리와 다른 사람들 간에는 정서적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리고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의 과정을 밟게 된다.

 

신앙이라는 포장 속에 쌓여진 무시무시한 감정들, 서로 불화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되는 실망감과 상처와 원한을 벗겨내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를 대적하는 수단으로 그것을 악용한다.

사단의 병기고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에 일부는 심리적인 무기이다.

두려움이 그 중에 하나이고 의심도 이에 속한다. 분노, 악심, 걱정 그리고 죄책감도 물론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약속을 믿고 용서받은 은혜를 체험한 후 까지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사단의 가장 무서운 심리적 무기는 열등감과 부족하게 느끼는것과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이다.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위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열등감에 의해서 꽁꽁 묶여져 있고 깊은 무가치감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사단이 우리의 생활을 패배와 실패로 이끌어가는 치명적인 무기들은

 

1. 낮은 자존감이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우리의 잠재력이 마비된 것을 보고 우신다.”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이상)들을 파괴시킨다.

우리는 두려움에 쌓여서 자기를 비천하게 만드는 것이 마치 성화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된 자기 멸시를 일컬어 헌신이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우리는 담대한 이상들을 가져야 할 때이다.

 

3.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친다.

사단은 우리에게 계속 열등감을 가속, 부족하게 느끼도록 하며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든다 .이렇게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개 사람들이 열등감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가능한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려 든다.

그리고 이 세상일들이 돌아가는 것을 가끔 바라다만 보고 만다.

 

누가 가장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인가?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결국 누구와 함께 지내기가 어렵게 된다.

 

4.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보지도 않고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하기 위해서 슈퍼 스타들을 택하시지 않는다.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엄마 치마폭에서 자란 아가에 이르기까지 검토해 보라. 모세는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께 자신이 말을 더듬는다는 말을 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하다가 도중에 도망쳐 나온 사람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전 1:26-31)고 바울 사도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약점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할 일을 주시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공급하시는 듯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려고 하시는데, 우리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런 기회를 잃고 만다.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용서함 받은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벌레나 메뚜기 같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낮은 자존감은 사단의 치명적인 심리적 무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우리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악순환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할 것이다.

 

자존감(Self esteem)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1부)

 

수년 전에 맥스웰 멀쯔라는 유명한 성형 외과 박사가 ‘새로운 미래를 소유한 새로운 얼굴’이란 책을 써서 가장 인기있는 책으로서 팔리게 되었다. 그것은 얼굴 성형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애의 문이 열렸다는 개인 개인의 경험담을 수록한 책이었다. 한 사람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을 때 놀랍게도 성격의 변화가 함께 동반되었다는 것이 저자가 다룬 주제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멀쯔 박사는 또 다른 사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가 경험한 성공적인 경우들이 아니라 실패한 경험들을 통해서였다. 그는 얼굴 성형 수술을 받은 환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수술 후에도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보통 정도의 얼굴이 아니고 실제로 아름답게 된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못생긴 오리의 모습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은 변화되었지만 변화되지 않은 옛 성격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더 어려운 문제는 그들이 거울을 들여다 보고는 의사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내 모습이 예전과 꼭 같이 보이는군요. 의사 선생님은 내 얼굴을 전혀 고치질 못했어요.” 사실상 그들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그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성형 수술을 받기 전과 후의 사진들을 대조해 보았을 때 크게 달라진 것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멀쯔박사의 환자들은 계속 이와 같이 우기는 것이다.

 

멀쯔박사에 의하면 마치 각 사람마다 얼굴이 있듯이 우리의 성격도 얼굴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이 갖는 얼굴이야말로 변화에 대한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얼굴이 상처난대로, 비뚤어진대로, 미운 모습 그대로, 열등감을 가진 그대로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외모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역할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감정적 상처들이 젝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변화될 수 있다.

 

당신의 성격 밑바닥 중심에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느끼는냐에 따라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라는 것이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문 상담인인 머리스 와그너 박사는 그의 훌륭한 저서 “가치있는 사람이 된 느낌”(The Sensation of Being Somebody,Zonderavan, pp. 32-37)이란 제목의 책에서 건전한 자화상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요소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속감이다.

이것은 누군가가 자기를 원하며, 용납하며, 돌보아주며, 즐기며,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마음 속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과 상담을 하면서 확신하게 된 사실은 그들 속에 느끼는 있는 거부감의 근원이 출생 전 그들의 부모들이 가졌던 잘못된 태도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 그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소속감을 거의 누리지 못하게 된다.

 

둘째 요소는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셋째 요소는 자신감이다.

 

우리의 자화상이 형성되는 데는 네가지 요소가 있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모든 악한 세력을 동반한 사단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다.

 

위대한 사회 심리학자인 죠지 허버트 미드는 [갖난 아이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고, 그가 성장해 가면서 남들과 서로 다른 점을 가려내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화상을 얻게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의 생애 가운데 존재한 중요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에게 비추어진 영상으로부터 얻는다] 고 하였다.

 

파괴적으로 모가 난 무관심과 결핍된 사랑의 “거울”이나 혹은 비난과 비교의 “거울”들은 그의 자존감을 아주 나쁘게 뒤틀어 놓는다. 그러한 아픔과 상처가 후에는 그의 성격에 침투된 병적인 요소로서, 또한 그의 잠재력을 마비시키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외부로 부터 주어진 자신의 자화상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 부터 주어진 믿음의 분수에 맞게 건전한 기준을 재정립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새로운 거울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너무나 많은 십대의 청소년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며,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다.

 

 

자존감(Self esteem)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2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자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믿음의 기본적 가르침에 역행하는 태도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적절한 자존감을 소유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낮은 자존감을 소유한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

 

건전한 생각이란 과대 평가도 아니고 과소 평가도 아니다. 이러한 균형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사단이 우리를 혼동케 하고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네가 지금 교만해 졌으니 조심하라”고 고소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과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 인정을 받으려고 애쓴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자기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만 열중해 있다.

지극히 자아 중심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공급받도록 하고 우리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과 함께 동역하라.

 

완전주의의 증상들

우울증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그 정도의 차이가 큰데, 특히 그릇된 영적 자세인 ‘완전주의’가 원인이 되고 있는 우울증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완전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완전케 되고, 거룩하게 되며, 성화되거나 혹은 성령 충만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모조품이다.

전자는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적인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바리새인이나 혹은 정서적인 신경쇠약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모습은 그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견딜 수 없을 때 가상적인 죄채감을 가지고 그들의 양심의 고통을 경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는 근거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태가 괜찮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죄의식을 가지고 이것을 철저한 양심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주 나쁜 악으로 존재한다.

가능한한 그것에 항복하지 않은 것이 가장 이로운 것이지만 만약에 그 가운데 빠져있다면 그 나쁜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건전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1. 꼭 해야 한다는 무서운 압박감:

절대로 무슨 일을 잘하지 못했다든지 자신이 훌륭하지도 못하다고 항상 느끼는 감정

 

2.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것:

완전주의와 낮은 자존감을 소유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지만 만족감이 있을리 없다.

 

3. 근심: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느낌과 자기를 멸시하는 태도는 죄책감과 근심, 그리고 비난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마음을 갖게 한다.

 

4. 율법주의:

외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들과 규칙들 그리고 제한된 법칙들을 융통성없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5. 분노:

꼭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적개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적개심,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반발하는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대치해 놓은 절망적인 사단의 모방물이다.

 

6. 부인: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분노를 직시하지 않고 부인한다.

화를 내는 것을 무서운 죄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억눌러 버린다. 자신을 싫어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도 잘 어울릴 수 없는 가운데 살아가려고 애쓸 때 오는 압박감과 긴장감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냉냉해지든가 와해되든가 하는 두 가지 양상을 가지게 된다.

냉냉해진다는 것은 머리로는 믿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주의에 따라 사는 삶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수 없이 노력했지만 그것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고 결국 그는 포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와해된 상태에서 고통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그 무게에 눌려서 와해된 것이다.

그가 매일 매일 동행했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느낌은 그가 가르쳤던 내용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도 만족케할 수 있는 분도 아니었다.

 

2. 상한 감정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대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완전주의로 부터의 궁극적인 치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 맺어진 관계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변화를 경험하려면 시간과, 과정과, 이해와,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재 조정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그릇된 태도가 고쳐져야 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그릇된 태도가 변하고, 파괴된 대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치고 상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기쁘게 받으신다.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

우리는 아무도 완전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인정받기 위하여 꾸몄던 ‘초인적 자아’를 버리고 ‘실제적 자아’의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건전한 자아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서적인 열심과 영적인 능력이 거짓된 이상적인 자화상을 꾸며내는 데에 사용되어 왔는데, 진실하지 못한 모습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생애를 정직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자신들과 싸우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개성을 인정하고 활용하여서 그 모습 그대로 성령님께서 사용하시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할 때에만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지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마음에 확정함이 없는 사람, 분을 참는 사람, 혹은 분을 함부로 쏟아놓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든다.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이제껏 자신을 화나게 하였고 우울하게 하였던 모든 원인들을 해결하시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그 분은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직접적으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모든 종류의 괴로운 심정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흡수시키셨다.

그것들은 그의 심장 속으로 깊이파고 들어갔고, 그의 영혼을 깊이 찔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깊은 물 속에 던지신 것처럼 완전히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상처와 증오와 영혼의 분노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고로 당신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아뢸 수 있다.

그가 당신의 문제를 이해하시는 고로 당신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과 은혜로써 받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굴복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며 그의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 기회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온전케 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다.

 

겉으로 온유한 것처럼 꾸미려는 가식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라.

화는 수즙음과 온유함과 영적인 경건의 밑바박에 깔려 숨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치유의 과정에는 화를 노출시킬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하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십자가에서 그것이 용서된다는 사실을 믿고 그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것을 시인하고, 대면하고, 굳게 결심하기 전 까지는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된다.

마음의 결심이란 상처를 주거나 모욕을 준 사람들을 하나하나 모두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을 대항하여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모든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죄의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끗이 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우리에게 자극적인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그 말들에 대해 지나친 반응을 보인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감추어진 상처를 누가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음 속에 원통함을 품게 되는 근본 원인은 불의에 대해 참지 못하는 화(분노)때문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환경에 의한 희생물이었어.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니 말이야......,

이렇게 손상된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곳은 바로 모든 불의의 총 집산지인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억울하게 받은 고통과 더불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보다 더 불의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우리 주님 만큼 배척을 당했던 사람은 없다. 그가 받았던 조소와 시련,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은 말할 수 없이 불의한 것이었다.

그는 한번 상처를 경험한 적이 있는 치료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연약한 감정을 스스로 체험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그 이상의 것들도 그가 이미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모든 종류의 괴로운 심정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흡수시키셨다.

그것들은 그의 심장 속으로 깊이파고 들어갔고, 그의 영혼을 깊이 찔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깊은 물 속에 던지신 것처럼 완전히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상처와 증오와 영혼의 분노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고로 당신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아뢸 수 있다.

그가 당신의 문제를 이해하시는 고로 당신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과 은혜로써 받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것을 쉽게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성만찬식을 베푸신 것이었다. 우리가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 먹을 때 우리는 깨어져못쓰게 된 것을 고치시고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이 찢기심을 당한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잔을 받을 때 우리의 영혼과 몸에 그가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실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내가 다른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나의 실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용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실제적인 내 모습과 다르게 보여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욕구가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대신 그에게는 깊은 근심이 쌓이게 되고 불안감과 무가치함과 감감각한 감정들의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난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건전한 자아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서적인 열심과 영적인 능력이 거짓된 이상적인 자화상을 꾸며내는 데에 사용되곤 한다.

불행하게도,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 해도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파괴적인 자아 형성 과정이 자동적으로 중지되지 않는다.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주신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인하여 진실되지 못했던 자신의 외적인 면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받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애를 정직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당신의 인격으로부터 아주 유치한 부분이 드러나는 경우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당신이 성장해야 할 부분이 과거 어느 지점에 그대로 머물러 전혀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은 그때 그때마다의 성장기를 통과하면서 신체적으로 성숙한 남자와 여자로서 변화되었지만, 영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에서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머무른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완전주의자가 봉착하는 가장 큰 문제는 감정적인 분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초인적 자아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꽉 억누른 가운데 있으며 대개 그는 자기의 감정을 전혀 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당신이 의롭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다.

초인적 자아는 분(노여움)을 나쁜 감정으로만 간주한다. 그것은 비성서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적절히 처리할 줄 아는 방법들을 배워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 속에 원통함과 비통함을 품게되는 것을 막는다.

분과 원망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분이 조절된 상태로 적절히 표현되는 것과 조절되지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표현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고(엡4:26)...., 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감정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건설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초인적 자신의 모습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과 잘 어울려야 하며, 누구나 다 당신을 좋아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어떤 갈등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성서로부터 온 것인가? 바울이나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도 함께 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혜롭게 서로 갈라지게 되고 초대교회는 지혜롭게 양쪽 사람에게 다 안수하고 그들을 축복한 뒤 서로 반대되는 곳에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하나님께서는 각기 다른 그들의 개성을 사용하시어 하나 대신 두개의 선교 사역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요한 마가에 대해 가졌던 의견의 불일치를 사용하시어 그가 성숙케 되는 계기를 마련하셨고 결국 요한 마가는 위대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던 것이다.

 

누구하고나 다 함께 일할 수 없다, 다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반드시 누구에게나 다 편안한 느낌을 가지고 그들을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적 자신이 모습을 지닌 당신은 서로 다른 점들과 서로의 갈등들을 시인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과 의견이 대립되는 것을 회피하지 아니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초인적 자신의 모습을 지닌 당신은 항상 보통 이상으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이란 단어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다’라는 어원으로부터 파생되었다. 행복은 우리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외적이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에 의존하여 결정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사용해야 될 올바른 용어는 ‘기쁨’이다. 그 이유는 ‘기쁨’이란 말이 외적 환경이나 사건에 상관없이 관계 가운데서 오는 내적인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은 폭풍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경험하는 내적 평온함이다.

감정의 폭풍우가 몰아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도 함께 있기 때문에 폭풍 가운데서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의 의미는 초인적 자아의 가면을 쓰고 웃는 얼굴로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하며 다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비통함과 슬픔과 상처의 외로움과 갈등 심지어는 우울증까지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실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실제의 당신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되어라.

당신이 초인적 자아의 모습을 지녀보려고 시간과 힘을 낭비할 때 그것은 당신이 성장하는 것이나, 또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기회를 빼앗아 간다.

그리스도는 실제적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아오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실제적 당신 자신의 모습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또한 보신다.

 

초인적 자신의 모습은 당신의 상상력에서 나온 환상이며, 거짓된 이미지이고 우상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당신을 고치시고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실제적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초인적 자아는 깨어지기가 매우 어렵고 그 중에서도 종교적 성격을 띤 초인적 자아가 가장 어렵다.

당신이 거짓된 초인적 자신의 모습을 계속 지켜나가려는 영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중지하여 당신의 참된 성장을 위하여 성령님과 동역하는 일에 그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거짓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안 받는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다.

 

아울러 실제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노력하므로 이루려 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생기는 간격으로부터 오는 무서운 정죄감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이 온전하신 예수님, 하나님의 참된 슈퍼.맨이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그 분께서 당신이 경험하는 채워지지 않는 간격들을 채우시고도 남을 정도로 채우신다.

 

영적으로 거듭난다고 해서 우리의 기본적이 성품에 속한 기질이 변화되지 않는다.

오스왈드 쌘더스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지 우리의 기본적 성품에 속하는 기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는 아무 것도 똑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단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기질적인 우울증의 현상을 영적인 우울증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사단은 우리의 정서적 우울증을 영적인 패배로 바꾸어 놓기를 원한다.

완전히 다 타버린 감정을 취하여 당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완전히 타버린 것처럼 만든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우리의 인격 속으로 쳐들어 온다.

당신이 자신의 개성을 용납하고, 당신의 기질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당신의 기질을 적대시하며 싸우던 것을 중지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질에 좌우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릴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우리를 지배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용납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신다.

우리와 함께 하는 또 다른 것을 이해하라!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둘째는 연약함과 약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치유를 경험한 상담자들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에게 우리의 연약함과 손상된 정서들과 갈등들을 감추지 말라! 성령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 기회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온전케 되는 것을 경험한다.

 

당신의 생애 가운데서도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