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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신문기고문을 보고서2024-06-05 13:4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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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연재하는 내 인생의 책을 아침마다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지난 주간에는 한 번역가가 기고를 맡아 올린 글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그의 첫 번째 추천 도서가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이었는데 형식은 책 추천의 형식이었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난도질한 독설을 읽으면서 현직 목사로 있는 자인 저는 수모감에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대학원 때 과학사·과학철학 수업에서 이 글을 접했다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덕에 한동안 안 다니던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애초에 내가 기독교를 등진 이유는 불가지론 때문이었다평생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막상 죽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그때 가서는 허망함을 느낄 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략성경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하지만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경향신문 10월 29일자 내 인생의 책에서)

 

이 낯선 번역가가 이렇게 기독교에 대하여 결정타를 날린 것에 대해 필자가 참담한 마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던 이유는 근본적이고 수구적인 교계에서 발끈하는 기독교계 폄훼나 비하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그가 공격한 진리’ 에 대한 선전포고 때문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번역가가 말한 마지막 독설은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기에 고민 끝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그는 본인의 기고문에서 대학원에 들어가 자연과학적인 철학적 사고를 공부하면서 교회에 나가던 추억을 엉뚱한 짓이라고 반추하였다필자가 예상하기로는 번역가는 아마도 본인이 설정한 기독교적인 도그마나 신앙적 내용에 대하여 분명하게 공격할 나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공부를 위해 교회를 나가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행위는 교회는 교회대로 그는 그대로 애석하고 아프기 그지없는 비극이다.

이후는 저자는 빈곤했던 자연과학적 철학 사고가 튼튼해 졌을 것이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 교회를 떠나고 등지는 일이야 교회가 공격의 대상의 수단이었으니 얼마나 쉬웠을까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물론 이런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분석이 아니라 지성적이고 학문적인 사유의 체계 안에서 접근하자면 그가 공부한 칼 포퍼를 포함한 불가론적인 사상과 각종 무신론적인 성찰들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고바로 이런 하드웨어적인 요소들이 그를 교회에서 돌아서게 한 여러 가지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허나 목사로서 심장을 공격받은 것처럼 치명적인 비수는 그의 표현대로 물론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한 대목이다모르긴 몰라도 대사회적으로 염려의 대상이 된 교계를 향한 서슬이 시퍼런 일반적 지성들의 성토 내용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기에 현직 목사로 사는 나는 수치스럽고 아프기 그지없다.

그의 공격에 대하여 뭔가 대항할 만한 무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딱히 그럴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아 벙어리 냉가슴 앓기로 그의 글을 읽은 지난 월요일 이후 마치 권정생 선생이 미국의 부시 정권이 이라크에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죽어가야 했던 바그다드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열이 40도에 육박했고 맥박도 심각하게 뛰었다던 그 심정이었기에 나 또한 한 주간 열이 올랐다그가 한국 기독교계의 이런 저런 일로 인하여 신앙을 버렸다는 것에 대하여 비난할 이유도 없고 또 그럴만한 자격이나 당위성도 나에게는 없다그리고 그의 자유의지적인 결단과 선택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다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잠수만을 탈 수 없는 문제 제기는 바로 이 대목이었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여기서 나도 독설 한 마디를 남긴다떠나는 것은 당신 자유이지만 선동이 지나치다당신의 글이 나는 또 다른 포플리즘의 한 구석으로 들리는 것은 천박스러운 대항이나 저항의 표현이 아니다왜 그럴까기독교 진리를 떠나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조금은 건방져 보이기 때문이다역사주의의 원흉으로 종교적인 선민주의를 지적한 칼 포퍼의 팔로워로 저자를 국한 한다면 필자도 이렇게 제기할 이유는 없다그런데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그 진리의 탈피가 마치 또 다른 진리인양 치부하는 것은 몹시 천박하고 유치해 보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극단적인 무신론 과학자인 장대익 교수와 함께 토론의 장을 연 호남신대 신재식 교수와 한신대 김윤성 교수의 치열한 논쟁을 담은 종교 전쟁’(사이언스 북, 2014년 간)을 숨 가쁘게 읽으며 공부했던 적이 있다이책을 읽은 분들은 이미 공감하였겠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은 학문적인 문제제기그리고 그에게 상응하는 지적인 방어논리로 서로가 치열하게 논쟁한 종교전쟁을 통해 필자가 받은 감동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답은 진화 중그러나 논증은 존중이었다.

 

흑백논리로 정답을 확신하는 것처럼 촌스러운 행위는 없다적어도 내가 주군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적인 교리의 예수가 아닌 나의 전인격적인 신앙의 반응 속에 나타난 예수의 진리를 또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구조로 정답인 양 확정하는 것은 그래서 지성인의 도리가 아니다혹시나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고집을 철회하지 않는 마음이 저자에게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인정한 칼 포퍼의 걸작인 열린사회의 그 적들’ 물론 탐구의 논리에서 수차례 언급한 포퍼의 좌우명 같은 철학의 명제인 불완전해야 완전하다.’의 인식과도 거리가 먼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말이다.

저자가 은혜(?)를 받은 추측과 논박에서 포퍼가 말한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만을 신뢰하고 또 그 반증의 내용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이미 궤변이며 비과학적인 것이라는 이론 그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원천 봉쇄하고 있는 집단이 기독교라고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사고와 이해에 대하여 전제한다면 충분히 기독교를 떠날 수 있겠다는 것에 대하여 필자도 그럴 수 있다고 동의한다다만 예수를 반증의 대상으로 삼아 그 또한 과학철학적인 사고 구조로 이해하고 또 그 범위 안에서 내 이성을 해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진리인 것을 인정할 없다고 선동하는 것은 또 다른 천박한 학문적 포플리즘으로 비쳐진다.

앞에서 언급한 종교전쟁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한다무신론적인 과학자 장대익 교수는 기독교가 말하는 기도에 대하여 아주 냉소적으로 비판했다그의 지론에 의하면 기도의 응답이나 효용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가 이렇게 말한 근거로 심장 질환으로 중보기도를 받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표본 조사 결과 효과에 별 차이가 없었다는 과학적 데이터를 제시했다뿐만 아니라 종교인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한다는 통설도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자료를 표본군(標本群)으로 추출하여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건강을 위한 기도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와 별다름이 없는 심리적 기저에 나타나는 인간의 반응이라고 점찍어 확증한 그의 글도 읽었다교회에서 기도응답이라는 것으로 신자들을 세뇌시키는 일련의 행태를 버리라고 종용하면서 그는 종교는 말살해야 하는 정신의 바이러스라고 독설하였다.(pp,144-147)

이에 관련하여 한신대 종교학과 교수인 김윤성 박사는 노기충천한 장대익 박사의 글에 다음과 같은 답신을 실었다.

기도나 기적이 인과적인 효과가 별로 없다는 과학적 연구 자체에 저는 별로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하지만 이런 생각이드네요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지정작 중요한 것은 기도가 효과가 있느냐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정말로 있느냐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 또 무엇이든 이런 저런 이유에서 기도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p,206)라고.

그러면서 김 교수는 이렇게 부연하였다.

순전한 통계적 연구만 놓고 본다면 기도의 실질적 효과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는지도 모릅니다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우리 인간의 삶이란 그런 통계에 갇히지 않는 숱한 차원들이 있기 때문이죠.”(같은 책, p,207)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필자가 김윤성 박사의 반론을 노트에 담은 이유는 앞에 소개한 글보다 그의 글 마지막에 언급한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의 말대로 사물을 인격화하는 습성은 결코 미개한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 중에 하나이며이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사고이다같은 맥락으로 기도도 기적과 효과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이다.”(pp,208-209)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를 포기하고서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독설한 저자에게 필자가 던지고 싶은 조언이 있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지 않고 주군이신 예수가 진리라는 명제를 믿는다.”

예수가 진리이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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