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에게 28년 전 11월 25일이 지난 주일처럼 주일이었다. 아버지는 그 날 섬기는 밀양 대곡교회 주일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단에 섰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슨 말을 전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단다. 이유는 네가 이 땅에 나온 날이라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네가 힘차게 세상에 첫 숨 쉬고 있을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별 생각을 다했단다. 어떻게 생겼을까? 엄마를 더 닮았을까, 아빠를 더 닮았을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날 더 닮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시답지 않은 상상을 하면서 병원으로 향했지. 그리고 신생아실에서 널 처음 보는 하나님께 감사 그리고 또 감사했단다. 누구를 더 닮았는가에 대한 기차 안에서의 실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그냥 건강하게 이 땅에 태어나주어서. 엄마가 너를 배안에서 키워가던 6개월 되던 어느 날, 네가 엄마의 자궁을 태반으로 가리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거꾸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누워있기에 발로 태반을 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해 태반이 터지는 경우, 1시간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태아도, 산모도 동시에 위험하다는 하늘이 노란 선고를 받은 뒤, 아버지는 캄캄했단다. 그런데 의사 말대로 8개월 즈음에 100명 중 한 명 꼴로 태아가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 자궁에서 돌아누우면서 태반을 끌고 올라가 정상 분만을 하는 기적 같은 일도 가능하다는 그 희미한 희망의 말을 듣고 그 때부터 엄마와 아버지의 기도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듯 하지만 이 기도가 기도의 전부였단다. “끌고 돌아눕게 하옵소서.” 너무 우습지? 하지만 그 기적의 주인공이 네가 되어 준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감사한 간증인지 지금도 복기하면 아버지에게 있어서 최고의 간증 제목이었다. 아들아. 교회에서 갈라디아서 강해를 3주 전부터 주일 예배에서 시작했다. 갈라디아서 1:4절을 읽다가 제목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정하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전했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교회사의 첫 번째 위기라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드린 기도와 맞물려 이 구절을 설교했단다. 나약한 인성을 갖고 계셨기에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공히 느끼셨던 주군이신 예수님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길이었던 십자가를 지기로 하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들이 죽어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었고, 또 그것의 실천만이 구원을 계획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예수께서 수용했기에 내 ‘원’(헬라어 – 델레마) 이 아닌 아버지의 ‘원’(선택)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해석하며 교우들과 갈라디아서 1:4절을 적용했단다.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던 주님의 이 어마어마한 사랑의 선택을 교우들과 나누면서 아버지는 김기석 목사 ‘오래된 새 길’에서 인용한 페루가 낳은 위대한 시인 ‘세사르 바예흐’가 ‘같은 이야기’에서 소개한 한 구절을 인용하며 설교를 맺었단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김 목사는 ‘세사르 바예호’의 이글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백의 감동을 남겼구나. “우리는 신이 아픈 어느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그 날, 태어났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삶이다.”(김기석, 오래된 새 길, p,237.) 사랑하는 아들아, 지난 주간에 아버지에게 보낸 준 글을 읽다가 참 많이 울었단다. 아버지가 이루려고 했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속상함 때문이 아니라 이제 내 아들 요한이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해 줄 만큼 많이 컸다는 그 감동 때문에. 아버지는 목사로 살아온 31년 동안, 사람을 보고 목회를 하지 않았단다. 이번에 아버지가 교단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단다. 하나는 지금의 독립교회 연합회라는 조직은 목회에 있어서는 최적의 필드이기는 하지만 교회 사역에 있어서 부교역자 청빙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해석이 어떻든 아버지가 부끄럽지 않게 목회를 한 고향이고 더불어 그들이 먼저 손짓을 했기 때문이었단다. 결과는 역시 정치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그래도 이 아버지는 고향 교단의 양심을 믿었던 바보가 되었구나. 이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와는 다른 사족이지만 혹시나 아버지가 고향 교단으로 돌아가면 아들에게 정서적으로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도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구나. 결과론적인 부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족마저 꺾으신 듯하다. 그걸 사람에 의지하는 것으로 판단하신 것 같다. 사랑하는 아들 요한아, 네가 알듯이 아버지는 목회를 하면서 제천 중앙에서의 사역을 제외하면 별 문제 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나름 고민하고 성찰하려는 몸부림을 해 왔단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얼마 남지 않은 정년동안에 끝까지 이 길을 가라고 압박하신 것 같구나. 노예가 주인의 뜻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을 조금도 용인하지 않으신 것 같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그래도 참 사랑했기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성결교단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 없이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이 일로 해서 아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을 주게 된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단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잘 해줄 것으로 믿는다. 정신과 전문의로 항상 약자 편에서 끝까지 서기를 주저 않았던 정혜신 박사 쓴 ‘당신이 옳다’를 보면서 그녀가 적정 심리학을 소개하면서 내 뱉은 촌철살인이 눈에 띄었단다. “두 집단을 양극단으로 해서 그 사이 어느 한 지점에 속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방식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이라는 깨달음이었다.”(p,24) 벼락처럼 다가온 그녀의 말 때문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단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목사가 버려서는 안 되는 것, 앞으로 이 에비가 걸었던 그 목사의 길을 또 또바기 걸어야 하는 아들이기에 참 안쓰럽지만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렇게 진실 되게 걸어줄 것을 믿기에 또 그렇게 성장해 주고 있는 아들이기에 안심하기로 했다.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편의 글로 남길 수가 없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읽은 책들에 사족을 반드시 남긴단다. 훗날 아버지가 물려줄 유일한 재산이 책이기에 열심히 적고 있단다. 지금이야 그 말들이 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먼 훗날, 아버지가 아들과 육신으로 함께 해 줄 수 없는 그날이 되면 그래도 아들이 붙들 수 있는 힘이 될 거라 믿기에 촌스럽지만 오늘도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 이 땅에 태어나 아버지가 제일 잘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요한이가 내 아들 되게 한 일이란다. 그래서 아버지는 너무 행복하다. 월터 브루그만은 ‘마침내 시인이 온다.’에서 성경 본문은 예언자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기에 설교자는 시인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정용섭 선배도 ‘목사 공부’에서 목사는 시인이 해석하는 풍부한 감성을 갖지 않은 자는 설교자기 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왠지 오늘은 아들 때문에 시인이 된 느낌이구나. 언제나 더 노력하고, 공부하는 아들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더불어 결코 높은 자의 자리가 아닌 낮은 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주님이 걸으셨던 그 고독한 길에서 이탈되지 않기를 아버지가 중보 한다. 이요한은 이강덕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고맙고 또 고맙다. 요한이가 내 아들인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