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장 큐티하기 이강덕 목사 1. 찬양하기 : 찬송가 455장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3:1-32 3. 큐티날짜 : 2011년 6월 8일 4. 말씀요약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여 제일 먼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에 앞서 예루살렘 성문들을 측근들만을 대동하고 답사를 완료했다.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사역에 집중했다 그 결과 드디어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특별히 3장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데 힘을 나누며 동역했던 사람들의 이름들을 빼놓지 않고 열거함으로서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귀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읽기가 쉽지 않은 장이지만 구절마다 내포되어 있는 영적인 도전은 귀하고 아름답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왜 양문을 제일 먼저 (1절)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예루살렘의 성읍은 맨 위쪽에서 아래쪽까지는 약 4KM 정도의 길이로 알려져 있다. 솔로몬의 성전이 휘황찬란했을 때 이 4KM의 길이에는 여러 개의 문들이 있었다. 위쪽으로는 양문, 하나넬 망대, 옛 문, 어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동문, 마문, 수문, 골짜기 문 등이 있었고 맨 아래에는 샘 문, 분문 등도 있었다. 느헤미야가 답사를 하면서 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졌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로 말할 때 이 문들이 다 무너졌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볼 때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 감당했던 문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1절을 주목하여 읽을 때 감동이 되는 레마가 있다. 이 많은 문 가운데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재건한 문이 양문(sheep gate)이라는 점이다.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가장 많이 드려진 양들이 출입하는 문을 의미하는 양문의 우선적 수축은 영적으로 나에게 큰 교훈을 준다. 무너진 제사의 우선적 재건을 위하여 양문을 가장 먼저 재건한 느헤미야의 영적인 시도는 곧바로 오늘 나에게도 예배 중심적인 삶의 회복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의미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예배에 생명을 거는 목사인가? 도전으로 다가온다. 2) 방관자가 되지 말라 (5절)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모든 사람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그들의 어깨에 짐을 지는 수고를 하였다. 드고아 출신의 사람들도 이 사역에 기쁜 모습으로 감당을 했다. 그런데 유독이 그 드고아 출신의 귀족들이 이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영어성경 NIV를 찾아보았더니 드고아의 귀족들은 성벽 재건 사역을 자신들의 어깨에 짊어지지 않았다라고 표현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분담하지 않았다는 말이 결국은 무슨 뜻인가? 동참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모두가 함께 하였는데 유독이 드고아의 귀족 출신들만이 이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고발은 후대에 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큐티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주목한 것은 그들이 ‘귀족’이었다는 점이었다. 방관자, 낙오자의 반열에 선 사람들이 다름 아닌 당대의 지식층의 사람들이었고 물질적으로도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었다. 항상 민감해지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그래서 인간적인 수단, 물질,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가치를 우선순위로 하는 연약한 심령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 확인한다. 왜 드고아의 귀족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데 모두 함께 힘을 모았는데 그들만은 담부치 아니했을까? 재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별로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기자는 팔짱을 끼고 성벽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엿보는 방관자를 역사의 기록에 남김으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겁하고 부끄러운 삶이었는지를 증언하도록 했음을 큐티를 통해 새삼 확인하며 하나님의 전 역사에 분담하지 않는 불쌍한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함을 가슴에 다시 새겨보았다. 3) 느헤미야는 어디에 (16절) “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3장에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동참한 75명 이상의 느헤미야의 동역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16절을 보면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도 이 사역에 동참했음을 소개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사람은 총독 느헤미야와 동명이인의 인물이지 느헤미야 자신은 아니었다. 느헤미야는 75명 이상의 이름을 열거했지만 정작 본인의 이름은 생략했다. 중요한 감동이 임했다. 내세우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 이 엄청난 사역은 내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하고 자신을 뽐내고 싶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이름을 앞세울 만한데 느헤미야는 이름이 빠져 있다. 이제 우리 교회 건축을 위한 거보를 내딛는 실질적 사역인 설계가 이번 주에 들어간다. 나는 어디에 서야 할 것인가? ‘이강덕목사가 건축하는 것이야. 내가 아니면 이 일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라고 자만하거나 교만하지는 않는가? 정말로 치밀하게 싸우련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건축의 주체자이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동역자들은 격려하리라. 4) 그 다음은 (2,31절)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2절)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31절) 무려 2절부터 31절까지 문장이 시작되는 맨 앞 구절에 ‘그 다음에’ 라는 이 단어가 반복된다. 느헤미야서 기자는 왜 지루하게 이렇게 반복적으로 기록을 남겼을까? 에 대한 이유의 답이 큐티하는 가운데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임한 감동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위대한 사역은 모두가 함께 한 사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감동이었다. 누군가 혼자서 한 것이 아니며 어떤 그룹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친 걸작품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건축을 하는 목사입장이기에 느헤미야 3장은 더 뜨겁게 다가온다. 우리 세인 교회 건축이 누구의 개인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사역이 아니라 세인 지체들 모두의 합력된 작품이었으면 하는 저의 소박한 바람은 욕심이 아닐 것을 믿는다. 이 벽돌은 누가, 이 벽돌은 누가, 이 벽돌은 누가 이렇게 간증했으면 싶다. 6. 기도 나의 삶의 주체가 되시는 존귀하신 하나님. 큐티를 통해 오늘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이 종도 예배를 가장 우선에 두는 목사가 되게 하시고 더욱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더불어 우리 교회에는 건축의 여정 속에 방관자가 없도록 하시며 서로를 격려하는 귀한 지체들이 되게 하옵소서. 동시에 종은 숨겨지게 하시고 우리 성도들의 수고가 후대에 알려지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교회는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