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예수님에게 나의 전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이상 세상적인 것들이 당시에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세상적인 것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내일 오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 인생은 변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전부인 인생으로 말입니다. 세상에서 만취한 상태로 전봇대 싸우던 옛 사람 이강덕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람 목사 이강덕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에 저는 이렇게 새로운 인생을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육신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교회가 너무 세련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이상하게 멋을 부리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잘 준비된 성가대의 품격 높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수준 높은 교양강좌를 듣기 위해 담임목사가 외국에서 일반학문을 토대로 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교회를 선호하는 신자들도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잘 갖추어진 교회 카페에서 교제를 나누며, 교회 북 카페에서는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를 함께 논하며 지식을 충족하는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구도자 예배를 강화하는 교회도 상당수 눈에 띕니다. 하나의 방편이 아닌 전부를 도입하려는 한국식의 조엘 오스틴과 로버트 슐러와 릭 워렌이 즐비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조금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교회들이라고 평가되는 교회들을 들어가 보면 이데올로기 전시장처럼 여겨지는 아픔들을 경험합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왠지 모르게 공산당에게 훈육을 듣는 것 같은 교실에 있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4년을 목회하면서 목사로서 여러 가지의 자괴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 전 바른 교회 아카데미에서 사역하는 간사 목사님들과 목회 포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지성과 영성을 갖추고 있는 간사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툭 던졌습니다.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와 부족한 종의 목양에 관심을 갖고 있는 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바르지 못한 성장에 대한 깊은 아픔을 갖고 저에게 던진 말인 것을 종은 압니다. 저도 그 간사님의 질문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고집하며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많은 영혼들이 전도되면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할 것이라는 얄팍한 상술 같은 의미에서의 전도가 아니라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라는 그 분의 소원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영혼 구원의 사역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교회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번 주부터 하나님의 교회에서 다양한 전도 사역이 시작됩니다. 세인 교회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이유인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방관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 구원의 사역은 당신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가장 강력한 이유입니다.
교회 존재 목적의 근본적인 대답은 영혼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