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양하기 :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8:1-18
3. 큐티날짜 : 2011년 9월 5일
4. 말씀요약
느헤미야 8장은 느헤미야라는 성경의 전 내용 중에 가장 극적이고 감격적인 은혜를 기록한 책으로 적어도 나에게는 남아있다. 하나님의 성벽 재건을 완성하고 그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에 앞서 유다 신앙공동체에게 있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기록이 8장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소위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의 역사이다. 느헤미야는 우여곡절 끝에 꿈에도 그리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다. 이제 그의 사명이 어떤 의미로 보면 마쳐진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바사에서 파송한 예루살렘 성읍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닌 정치가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영적인 한계가 있었다. 지금 유다 신앙공동체가 성벽 재건을 완성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회복과 각성임을 알고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본인의 영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동시대에 가장 영적 영향력이 있는 학사 겸 율법학자였던 에스라를 강사로 초청하여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강사로 나선 에스라는 이 수문 앞 광장에서의 부흥회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여 지쳐 있었고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유다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잡이하는 데 승리하였다. 내용을 보면 감동의 감동이다. 제일 먼저 에스라는 율법을 들고 단 위에 섰다. 율법이 낭독되었을 때 수문 앞에 모인 신앙공동체가 일어섰다. 이윽고 그 율법을 다시 한 번 에스라가 해석하자 이번에는 신앙공동체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지금까지 행했던 불신앙으로 인해 임한 고난과 멸망, 포로에서의 수난 그리고 포로귀환이라는 파란 만장한 역사에 대한 통절한 회개와 참회였다. 유다 신앙공동체가 통곡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던 느헤미야는 그들을 향하여 이제는 그만 울음을 그치라고 권면 한 뒤 성일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백성 된 자의 임무임을 강조하자 비로소 유다 신앙공동체는 울음을 멈추고 함께 먹고 나누며 즐거워하기를 시작했다. 이런 부흥을 경험한 그 다음날 유다의 족장들과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다시 에스라에게 모여 후속 은혜를 간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요구에 에스라는 잃어버린 초막절을 지킬 것을 명령했고 에스라의 가르침을 받은 공동체가 즉각적으로 명령에 순종하여 7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며 제 2의 부흥을 경험하는 내용으로 8장은 끝을 맺는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열정과 냉정 사이 (3절)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의 문짝을 달고 완벽한 재건을 완성한 뒤에 이제는 곧바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회집하는 명령을 내렸다. 회집의 내용은 부흥회였다. 수문 앞으로 신앙공동체의 회중들이 모여 영적 각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다시 한 번 각성하자는 내용이었다. 요즈음 아주 상투적인 글귀이지만 말 그대로 ‘영적 대 각성 성회’였다. 느헤미야는 본인이 평신도 사역자라는 사실을 알고 영적 권위를 월권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에스라를 부흥회 강사로 청빙하였다. 에스라는 부흥회 강사 사역을 수락하고 모세의 율법서로 추측되는 하나님의 율법 책을 가지고 와서 성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7월 1일 그러니까 초막절을 기념하는 속죄주간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성회가 시작되었고 유다 신앙공동체의 회중들이 일제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음을 느헤미야 기자는 보고한다. 바로 그 시간 정말로 감동을 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이다.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의 새벽은 동트기 이전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전 6시라고 기준할 때 정오까지는 무려 6시간 이상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최소한 6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부흥회의 시간을 산정할 때 놀라운 감격이 임한다. 그들이 6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에스라가 낭독하고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음을 본문은 말한다. 6시간 동안 이어지는 말씀의 봉독이 뜨거웠으면 얼마나 뜨거웠을까? 아무리 점수를 후히 주어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6시간 이상을 그렇게 율법에 집중하게 하였던 것일까? 부흥을 사모하는 갈급함이 정답이다. 옳다. 바로 이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을 사모하는 열정과 갈급함이다. 나는 생각한다. 말씀의 쓰나미가 밀려오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씀의 쓰나미는 밀려오는 데 그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과 열정은 보이지를 않는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냉정만이 보인다. 우리 세인교회 신앙공동체는 말씀의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말아야 한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외롭게 싸우는 엘리야에게 그 누구도 함께 목숨을 걸고 응원하려는 북 왕국의 사람들은 없었다. 머뭇머뭇하는 사람들만이 보였다. 엘리야의 고독한 외침이 들려온다. 나의 영성을 파고든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새벽부터 정오까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사모하는 바로 그 열정이 종과 군사 1기와 세인지체들에게 강하게 임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 당신은 울고 있나요? (8-9절)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모든 성경 말씀을 참으로 사모하지만 이 말씀 구절만큼이나 종을 전율하게 하는 말씀은 그리 흔치 않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단 위에서 들고 읽을 때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중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에스라가 말씀을 해석했다. 해석하는 순간 회중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들이 왜 울었을까?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회한(悔恨) 때문이었다. 격정적인 후회와 아쉬움 때문이었다. 열조와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난 그 죄악으로 인한 징계가 봇물처럼 추억의 뇌리 속에서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아,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아, 우리들의 열조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 바로 이 회한과 깨달음으로 울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이유로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 본다. 유다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인 참회와 각성을 통해 흘리는 눈물, 그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눈물인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죄에 대한 통회의 눈물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기독정당을 만든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정신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고, 또 우리 세인교회가 살고 , 바로 우리들이 사는 방법은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이 범죄임을 깨닫고 눈물로 드린 시가 가슴을 때린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당신은 울고 있나요? 유행가 가사가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어야 하지 않을까?
3) 당신은 웃고 있나요? (9-10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유다 신앙공동체는 열조와 자기들의 죄를 토로하며 말씀에 비추어 회개하고 각성하는 눈물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드렸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리는 눈물의 고백을 보고 있던 느헤미야가 이제 다시 회중들 앞에 일어섰다. 그리고 회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이제는 그만 울어라.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돌아가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혼자 그렇게 하지 말고 없는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가슴에 남는 선포를 하기에 이른다.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가슴에 절절하게 남는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각성과 회개를 경험한 뒤에 오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이것은 진정한 기쁨이다. 이것은 세상의 웃음과 기쁨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웃음이요 기쁨이다.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기쁨, 바로 이것이 진정한 기쁨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지난 집중훈련에 참석한 대만, 일본, 태국에서 온 교역자들을 옆에서 보았다. 세 나라들은 공교롭게 우상 천국의 나라들이다. 그곳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 사역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믿음의 선진국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재충전하는 과정에 그들이 울고 웃는 감동의 시나리오를 써가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간섭하심에 울고 웃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느껴지는 희락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의 비밀이다. 당신은 웃고 있나요? 사도바울의 노래가 힘이 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기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하신 하나님. 군사 1기가 종의 마음을 닮아가는 지체들이 되게 하옵소서. 종은 물론이거니와 1기 지체들에게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여호와로 인하여 울고 웃는 감동의 연속이 후반기 사역 동안 지속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군사 1기 군사 되게 하옵소서. 방학 동안의 패배의식은 초토화되게 하시고 다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