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교 학부에서 공부할 때, 인천에 소재하고 있는 모 재활원에서 약 1년 동안 영어 교사로 야학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중증 장애우들은 물론이거니와 교통사고로 졸지에 장애인이 된 청소년들을 성심성의껏 지도하면서 필자 스스로 도리어 많은 감동을 받고 은혜를 경험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당시에 보모로 사역하던 출신교회 선배가 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형제를 불러서 근처 가게에 가서 두부를 사가지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마침 옆에서 그 일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형제는 보모가 자기를 유독이 사랑해서 이 일을 시킨다는 마음에 너무 좋아 선배에게 표현했던 어린아이 같은 행동으로 볼을 비비며 발음도 잘 안 되는 어법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표현을 잊을 수가 없다. 20세가 된 장성한 청년이 선배를 향해 던지는 해맑은 그 사랑고백은 필자에게는 수 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필자가 섬기는 세인교회는 대외 섬김 사역으로 1년에 한 번 장애우 선교단인 밀알 선교단을 초청하여 섬긴다. 매 년 여름의 길목으로 들어가는 6월의 정기 사역이다 보니 언제나 이 섬김을 위해 헌신하는 지체들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감사한 것은 이 사역의 현장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인 몸으로 교우들이 돕는 품앗이를 한다는 점이다. 약 50여 명 정도 되는 장애우들을 내 몸처럼 돌보며 한 날을 섬긴다. 그 섬김을 보는 장면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본인도 장애우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또 다른 장애우들의 권리 보호와 법적인 아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변호사 김원영은 이렇게 피력했다.
“장애인들은 장애가 개인의 비극이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중략) 우리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서로의 존재가 비정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우리 존재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으로 나아간다.”
그의 글을 읽다가 가슴앓이처럼 다가온 단어가 있다.
‘투쟁으로 나아간다.’
왜 투쟁이라는 단어가 그의 뇌에서 만들어졌을까? 어찌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내가 그것을 갖고 있는 자들의 마음을 십분 헤아릴 수 있겠는가의 질문에 대하여 자답할 수 있는 건더기는 많지 않아 접근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착한 아픔 중의 하나는 왜 편치 않은 장애우들은 투사가 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해 이 사회가 대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매우 유감스럽고 또 유감스럽다.
그러기에 이들을 위해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는 일이지만 그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덤벼드는 것이 그냥 그들을 정중하게 초청하여 따뜻한 밥 한 끼 하는 것이다. 아니 더 욕심을 낼 수가 없다. 내 스스로가 그들이 투쟁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데에 별로 보탬이 될 만한 큰 그릇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장애우를 돕는 사역은 개척 당시부터 지금까지 10년을 매일반으로 달려왔다.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 교회개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자들에게 마음에 대못을 박히는 일들을 다반사로 당했다.
“자기 교회 건물도 없는 개척교회가 별 짓을 다한다고.”
“분수를 모른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필자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렇게 대항했다.
“그래도 이 짓은 계속할 거라고!”
세인(世認)교회, 이름값은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집스럽게 지난 10년을 한 마음으로 달려왔다. 가끔 인용해서 이제는 교우들에게는 상용구가 될 정도 익숙해진 표어 같은 이 슬로건을 외우고 또 외운다. 의도적으로.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쪽(?)팔리는 교회되지 말고, 세상이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주존감(主尊感)이 있는 교회가 되자.”
아무리 생각을 해도 우리 교회의 이름은 너무나 잘 지은 것 같다.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 세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