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밀양의 아주 열악한 농촌에서 단독 목회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들녘에 벼 수확이 끝나고 보리농사의 씨를 뿌리기에 한 창이던 어느 주일 아침에 아들이 이 땅에 기지개를 피면서 태어났습니다. 아내가 서울의 모 병원에서 아들을 해산했을 때 종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였기에 아내와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어떻게 주일 예배를 인도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통일호(지금은 없어졌음)를 타고 아내가 아들을 낳은 병원으로 올라가는데 왜 그리 가슴이 쿵쾅거리든지, 그렇게 상기된 얼굴로 병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병실에 도착을 해보니 장모님과 처남과 누님이 미리 도착을 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들 아빠가 된 것을 축해해 주셨지요. 아내의 수고를 격려하고 신생아실로 발길을 옮기던 날, 무언지 모르지만 가슴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습니다.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전치태반이라는 날벼락의 진단을 받고, 태반이 조기에 터지면 임산부와 태아까지 잃을 수 있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아픔을 경험한 뒤, 그 모든 위기를 기도함으로 이겨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적으로 이 땅에 태어난 간증거리의 아들이기에 아마도 그런 격한 감정이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신생아실에서 간호사가‘심재열아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핏덩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처음 보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건강하게 태어나준 것에 대한 감사가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너무 놀란 것은 나와 똑같이(?)이 생긴 또 하나의 생명을 보면서 이제는 아빠라는 이름의 삶을 살아야 하는 무겁지만 행복한 결단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이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내일 군복무라는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인생의 무대에 나서게 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 된 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식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입대시키기까지 양육을 하면서 아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아비의 입장만을 고려한 대로 키우려고 했던 욕심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내가 생각한 대로 자라주기를 기대했기에 어떤 때는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큰소리도 내고 했던 강제적인 주입의 카드를 꺼냈던 적도 참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뒤돌아보면 그래도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조차 주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동시에 아들이 건강하게 그리고 주의 종으로 사역하는 과정으로 자라 준 만해도 종에게는 감사의 조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들이 군종병으로 입대가 결정되는 날부터 아들을 위해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① 하나님, 아비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영적인 영향력을 받을 수 있는 담임 군목을 만나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 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군종병으로서의 부대원들에게 영적인 자존감을 보여주는 아들로 꿋꿋하게 서게 하옵소서.
재론하지만 지금까지 잘 자라주어서 군에 입대하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선배 목사님들에게서 너무 많이들은 이야기라서 너무 상투적인 것 같지만‘자식을 떠나보내는 연습이 잘 되어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명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군으로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아들에게 아비가 주는 선물이 주려고 합니다. 종이 성경 66권의 31,073절중에 종이 제일 사랑하는 구절을 선물로 주려고 합니다.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Rom 8:31-NIV)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1)
가슴에 새기고 건강한 군 생활을 감당하는 아들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