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2장 큐티 하기 1. 찬양하기 :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12:1-47 3. 큐티날짜 : 2011년 10월 10일 4. 말씀요약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이 정해졌다. 싫든 좋든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거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느헤미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그가 우여곡절 끝에 재건에 성공한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봉헌식이 27-43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벽 봉헌의 역사적인 기록을 기록하기에 앞서 느헤미야는 1-26절까지 성벽 재건과 봉헌이라는 역사 앞에 그래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신앙공동체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의 명단들을 열거함으로서 회복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역사가 하나님이 지목하여 불렀던 선민 공동체의 정체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1-7절에서는 가장 중요했던 핵심 그룹의 명단을 정리해서 밝히고 있으며, 8-11절까지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던 예수아의 후손들의 족보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어 12-21절까지는 제사장 족보의 족장들의 이름을 소개하였고, 22-26절까지는 앞서 열거한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의 사역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선민 공동체의 사역들을 정리한 느헤미야는 이윽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에 이른다.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은 전국에서 모인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제일 먼저 몸을 정결하게 씻는 정결례를 시작으로 성과 성문을 또한 정결하게 씻었다. 그런 뒤에 이제는 대오를 이루어 유다 백성들이 성벽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을 했다. 행군도는 다음과 같았다. 제일 일선에는 유다의 방백들이 앞섰고 그 뒤를 이어 감사 찬송을 하는 무리들이 두 갈래로 성벽을 향해 올라갔다. 한 무리는 오른 쪽에 위치 해 있는 분문 쪽을 향하여 또 한 부류는 반대 편 쪽인 망대 윗길 쪽으로 가면서 찬송을 하며 성벽을 돌기 시작을 했는데 이들은 결국 한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행진이었다. 이 성벽 봉헌을 위한 예식을 진행하면서 유다 신앙공동체는 맨 마지막 순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크게 기뻐하는 즐거운 소리들이 멀리서도 들릴 정도의 축제의 장이었다. 성벽 봉헌을 드리는 그 날 유다 신앙공동체는 다시 한 번 그들의 영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께 제사하며 영적인 섬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44절), 이와 걸맞게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에 올인한 성직자 계열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섬길 것을 결심하고 그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결의하였음을 보고하고 있다. 백성들의 십일조 결심은 비단 성직자들의 생활비뿐만이 아니라 노래하는 자들, 성벽 문지기들의 생활까지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결단이 결단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실천되었다는 것까지 본문 47절 마지막에 기록하며 유다신앙 공동체의 승리를 보고함으로 본 장을 마감하였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좋은 세습(?) (1-7절, 12-21절) 성벽 봉헌을 앞두고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 당시 예루살렘의 영적 기상도를 보여주고 있다. 문자 그대로 설명을 한다면 대제사장직을 수행 한 것으로 보이는 예수아 이후 그의 후손인 얏두아에 이르기까지 제사장직은 세습되었다. 8-11절에는 특히 대제사장 예수아의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더 놀라운 보고는 예수아의 계보에 나타나 있는 그의 후손들 20대에 걸쳐 아들들 전부가 대를 이어 아버지의 계대를 이었다는 점이다. 성경에 보면 구약 시대의 성직은 철저히 세습되고 있는 것이 통례요 관례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사회적인 이슈까지 대두되어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회자의 세습을 성경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성서적인 것이기에 방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론이 설정된다. 개인적으로 나도 목회자의 세습에 대하여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 있는 아비의 입장에서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전혀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것은 오기가 아니다. 이유가 있다. 시대의 설정이라는 전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장 큐티에서 보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거주와 생활은 죽기를 각오한 희생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예루살렘 제 2 스룹바벨 성전을 관리하는 사역과 성벽을 지켜야 하는 파수꾼의 역할은 대를 이어 충성할 만큼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할 수만 있으면 도망가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루살렘에서 계대를 이어 제사장 직을 세습한 제 2세대의 순종은 아름답다. 말 그대로 좋은 세습(?)이다. 오늘날 대형 교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물려주어 엄청난 advantage를 아들로 하여금 얻게 하는 그런 질 나쁜 세습이 아니라 생계유지가 어려운 시골교회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위해 아들이 헌신하는 모양새가 바로 오늘 느헤미야 시대에 세습된 제사장들의 희생적 세습이다. 묵상하며 앞으로 목사가 될 아들을 위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지지해 주어야 할 몫은 무엇일까를 진솔하게 고민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져본다. 2. 멀리 들린 기쁨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낙성식을 거행하는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을 드리고 있다. 제사를 드릴 때 기뻐했다. 부녀들이 기뻐했다. 어린아이들도 기뻐했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축제가 바로 봉헌식이었다. 성벽을 봉헌하는 날, 그 즐거움이 얼마나 장엄했으면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보고하고 있을까?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목사로서 아주 중요한 도전을 받았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드리는 날마다의 예배는 하나님께 내 삶을 당신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나의 몸과 마음을 봉헌하는 축제인데 정말로 얼마나 우리 교회는 진정한 기쁨이 있는 대날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인가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의 기쁨이 멀리까지 들려야 되지 않을까?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 영적 신바람으로 춤을 추는 예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성도들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며, 성령도 춤추시는 그런 예배를 날마다 드려보기를 소망한다. 3. 영혼 목욕하기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공동번역 성경을 보았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백성과 함께 성문들과 성에서 부정을 씻는 식을 올렸다.” 눈이 띠는 단어가 있다. ‘목욕재계’이다. 성직자들이 목욕을 하고 성벽 봉헌식에 임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성벽 봉헌과 목욕재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분명히 성직자들은 목욕을 하고 성벽을 봉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취미가 목욕하기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주일에 두 번을 목욕탕을 찾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목욕을 하고 난 뒤에 그 개운함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30절에서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목욕을 했다고 했다. 백성들도 그 뒤를 따랐다고 했다. 집단적 목욕이다. 그런데 큐티를 하면서 정말로 깜짝 놀란 것은 성문과 성벽을 목욕시켰다는 구절이 나를 흥분하게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 나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혼 목욕하기이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정신의 목욕,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성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유다신앙공체의 집단적 영혼의 목욕,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우리 세인공동체가 매일 이렇게 목욕하기를 기대하고 소망해 본다. 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루살렘 성벽 봉헌을 통해 귀환한 유다 신앙 공동체의 영혼의 기쁨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세인지체들에게도 이 기쁨과 감격과 노래와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 노래와 기쁨이 제천 도성을 흔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