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들어 경북 예천에 거주하고 있지만 세인교회 멤버십이 된 지체 가정을 방문해서 지난주 화요일에 심방함으로써 가을 대 심방 일정을 마쳤다. 경북 영양에 계시는 권사님 가정까지 포함하여 이제 매년 경북 심방은 세 가정이 될 것 같다. 예천에 늦은 오후쯤 도착해 두 번째 지체 가정을 방문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지체가 손수 직접 저녁 식탁공동체를 준비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섬김을 받았다. 식탁이 준비되는 동안 잠시 앉아 기다리는데 소파 위쪽에 놓여 있는 책들이 보였다. 첫 번째 책을 집어 들고는 화들짝했다. 제 손에 잡힌 책 제목은 해체주의 철학을 들고나오면서 그동안 현대철학계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미셀 푸코나 자크 라캉의 구조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자크 데리다에 관련된 책 『데리다와 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였기 때문이었다. 3년 전쯤, 나는 데드 제닝스가 쓴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읽는다』에 꽂힌 적이 있었다. 이유는 바울에 대한 해석이 역사적 예수 이해자나, 신앙적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서있는 부류들이 너무 극단적으로 기울어 있는데 바울 해석에 대한 지성적 균형을 잡으려는 데리다를 보았기 때문이다. 결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편향성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데리다였기에 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나 또한 데리다를 비평적 성찰 없이 수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겐 신선했던 기억이 오롯하다. 그랬는데 내가 섬기는 교회 지체로 전입한 지체가 데리다를 읽었다는 것이 어찌 감동과 충격이지 않겠는가! 평신도가 자크 데리다를 읽는다는 게 말이 돼? 소회를 느꼈기에 감정을 추스르고 잠시 머뭇하다가 지체에게 질문했다. “집사님, 어떻게 데리다와 들뢰즈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지체가 이렇게 답했다.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라캉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니 당연히 바늘과 실처럼 데리다를 읽어야 됨을 알았고 그래서 도전하게 되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지체의 답을 듣고 나서 다시 또 감사했고, 감동이었다. 왜? 작금의 오늘,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를 질문하면 ‘그렇다’고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성찰을 완벽한 이해를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생각함과 사유함을 놓지 않으려는 지체의 그 치열함이 내게는 중요했다. 옆에서 심방대원으로 섬긴 김 전도사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느낌으로 대화를 엿들었다. 나름 당황하는 부교역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 전도사, 왜 목회자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여기서 리얼하게 배우게 되어 축하한다.” 지체가 섭렵한 박영욱 교수가 해제한 이 말을 3년 전에 나는 노트에 담아 놓았다. “다른 사람과 나와의 차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를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았다.” (박영욱, 『 데리다와 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김영사, 63쪽) 목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공부가 차이에 대한 인식조차도 성찰하지 않으면 획일화시킬 수 있는 견강부회의 누(漏)를 범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예천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또 한 명의 사유하는 지체를 동역자로 만들어 주신 주군께 감사했다. 놀 시간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