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감을 받고서 처녀 단독목회지였던 밀양 대곡교회였다. 밀양(密陽)이라는 한자 단어의 빽빽할 ‘밀’(密)이 왜 들어가 있는지 목회지에 부임하고 알았다. 밀양이라는 땅은 마을이 있는 곳을 찾으려면 굽이굽이 빙빙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그만큼 빽빽한 구조를 갖고 있는 땅이 밀양이다. 30세의 새파란 나이에 담임전도사로 사역했던 밀양에 소재한 대곡교회는 지금도 내 사역의 뒤안길을 돌이킬 때마다 울컥하게 한다.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농촌교회, 읍내에서 교회까지 거리가 10리 정도가 되었기에 당시 교회 차가 없어 소위 말하는 똥차(읍내에서 교회까지 운행하는 마을 버스)를 타야만 장을 볼 수 있었던 시골 교회, 도로가 비포장이라 비라도 올라치면 신발이 만신창이가 되던 교회, 사택이 지어진 지가 너무 오래되어 사택 천장에는 쥐들이 들끓고, 가끔은 뱀들이 출몰해 아내를 기겁하게 만들던 교회, 당시는 소각이 허용되던 때라 웬만한 쓰레기를 태웠던 소각장이 교회 뒤편에 있어 여름철만 되면 파리를 들끓던 교회, ‘그때를 아십니까?’에서나 볼 수 있는 수세식 퐁당 화장실에는 닦고 닦아도 구더기가 있던 교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열악한 곳에서 3년이나 사역할 수 있었지 스스로 놀라워하던 내 처녀 목회지는 밀양시 초동면 대곡리 390번지에 위치해 있었던 대곡교회였다. 하지만, 지난 35년의 목회를 반추할 때, 가장 행복한 교회가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대곡교회라고 주저없이 답한다.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 교회를 너무나도 아끼며 사랑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인근 지역, 밀양, 마산, 창원, 대구, 김해, 심지어 부산으로 직장을 잡아 주중에 도시로 나갔다가도 토요일만 되면 누구도 예외없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향 대곡리로 들어와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섬기고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예배를 드린 뒤에 다시 월요일에 삶의 터전을 삼고 있는 직장이 있는 곳으로 나갔던 청년들이 이끌어 갔던 교회, 비록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로 그 당시 유행하던 이-라면으로 때우면서도 너무 행복해하던 지체들이 있었던 교회, 박봉의 박봉을 받으면서도 누구도 예외없이 십일조를 드리며 농촌 교회 살림을 이어갔던 아름다웠던 교회, 토요일에 고향으로 들어오면 너나 할 것없이 이제 막 태어난 요한이에게 줄 과자를 손에 들고 교회 사택을 먼저 찾던 아름다운 청년들이 있었던 교회, 자궁암 말기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고, 살고 있던 곳은 산을 두 번 넘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곳에 거주하던 노 성도가 살인적인 더위로 유명한 밀양의 여름, 성경학교가 열릴 때 거의 기다시피 교회에 오셔서 몸빼 바지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꼬깃꼬깃한 5,000원권 지폐를 주면서 “전도사님예,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이소!” 라고 건넬 때 정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교회가 내 처녀 목회지 대곡교회였다. 3년 만에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올 때, 마을 사람들이 대곡교회 신자들은 벌에 쏟여 눈땡이가 밤땡이가 되었다고 놀렸던 교회에서 사역하는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매년 이 맘때 즈음이면 밀양의 특산품인 단감을 보내준다. 이 사랑을 해마다 전해주는 사모님은 놀랍게도 내가 사역할 때 대곡교회 섬기기에 일등공신이었던 정말 사랑했던 자매다. 하나님은 대곡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여전히 사랑하신다. 30년 전, 대곡교회를 사랑했던 푸르디 푸른 청년들이 중년이 되어서도 지금도 고향교회를 떠나지 않고 섬기고 있는 지체들이 있기에. 오늘도 사랑의 파도타기를 중단하지 않고 있는 대곡성결교회가 끝까지 사랑하기의 보루가 되어주기를 화살기도한다. 늙어서인가! 대곡교회가 보고 싶다. 가보고 싶다. 대곡교회는 언제나 내 마음의 교회다. 전미경 사모님, 단감 잘 받았어요. 언제나 행복하기를 기도해요. 건강하기를 화살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