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7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서른 두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3:1-15 제목: 리더십이 요구될 때 서론) 공동체를 이끄는 동력은 지도자의 리더십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지도자가 갖고 있어야 하는 능력, 즉 리더십은 공동체가 승리하는가, 혹은 실패하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유다 이야기를 화두로 삼아 설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먼저 창세기 37:26-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 구절을 복기하면서 느낀 소회가 있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살리는데 공을 세운 자인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버린 형제들에게 유다가 나서서 한 말은 요셉을 여기에 던져 죽이는 것보다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제안했음을 우리는 지난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결과론으로 보면 유다는 동생 요셉에게 심각한 고통을 준 도진개진의 형인 것이분명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유다는 요셉을 살린 주역 중에 한 명이 된 것으로 여겨지게 해주는 구절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38장에서 우리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한 비윤리적인 내용을 보고하고 있음도 이미 살폈습니다. 그런데도 이 비윤리적인 메시지를 창세기가 그대로 보고한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유다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조명하고 싶었던 창세기 저자의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부정적 평가가 아니라 유다를 통해 이루어진 구속사의 잇댐이라는 메시지가 보입니다. 요셉을 죽이지 않고 팔아넘긴 주역이 된 유다, 며느리의 몸을 통해 자식을 낳은 유다는 오늘의 윤리적 측면으로 해석할 때는 비상식적인 일탈의 주인공이지만, 성서가 이끌어가는 유다의 궤적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에 대한 이런 호의적 평가에 극치라고 말할 정도의 메시지를 독자인 우리에게 줍니다. 본론) 야곱의 아들들이 우여곡절 끝에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야곱은 물론, 아들들의 마음도 전혀 편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가나안에 닥친 기근이 끝나려면 아직 5년이라는 기간이 더 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곡식을 사려 갔던 아들들은 커다란 숙제가 있었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억류되어 있는 시므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야곱에게 아들들은 본인들의 살벌했던 애굽 경험담을 설명하면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야함을 역설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싸늘하게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언급한 대로 가나안에 기근이 끝나려면 아직 5년이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본문 1-2절은 적절한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야곱은 다시 아들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본문 3-10절까지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갖고 논쟁하는 장면을 보고해 줍니다. 야곱이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입해 오라는 압박을 하자 넷째 아들 유다가 각오한 듯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42장에서 살폈던 것처럼 애굽의 총리 요셉이 자기들에게 압박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복기합니다. 우리가 다시 애굽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제 조건이 필요한데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베냐민과 동행하지 않는 애굽행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임전무퇴의 각오였습니다. 유다의 압박을 받은 야곱은 애굽의 총리에게 막내가 있다는 가족사를 거론했다고 야단치며 베냐민을 끝까지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자, 다시 유다가 결의에 찬 각오로 이렇게 항변합니다. 다시 본문 7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이렇게 강하게 항변한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본인의 의지를 말로만 표한 것이 아니라,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를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8-9절입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이 구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베냐민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베냐민을 책임지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면 자신의 아들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역설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까지도 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읍소까지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강하게 항변하며 자신의 의지를 천명한 유다의 발언 끝에 야곱이 베냐민과의 동행을 허락했다는 점과 더불어 또 하나, 요셉에게 갈 때 가져갈 것들을 물질 뿐만이 아니라,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 나무의 열매, 감복숭아 등등을 내놓으면서 애굽 총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 형식의 물건들까지 챙겨줍니다. 이렇게 베냐민을 내주는 마지막 대목에서 창세기 기자는 야곱의 면을 세워주는 기록을 남깁니다. 마지막으로 14절을 나누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으로 해제했습니다. 하경택 교수의 해제는 이렇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식을 잃게 되면 잃게 될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베냐민을 보낸다. 이 말에는 한편으로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으로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하밈)에 맡기는 야곱의 믿음이 담겨 있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462쪽.) 하 교수의 주석적 해제는 야곱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으로 설명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학자가 갖고 있는 신학적 성향에 따른 발췌한 해석의 내용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경택 교수의 해설에 완전하게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끝까지 자식 둘을 나머지 10명의 아들들의 안위나 수고에 비해 차별하고 편애하는 야곱의 고집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야곱에 대한 긍정의 평가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제가 주목하고 싶은 교훈은 유다의 리더십입니다. 주지했다시피 요셉의 넷째 형인 유다 역시 자신을 애굽에 팔아넘긴 매정한 형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공범입니다. 하지만 여운을 남겼듯이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고 있는 계대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계보로 사용된 계보입니다. 그러기에 다말과의 관계도 적나라하게 고발했지만, 고대 팔레스타인 영역에서 종족 보존이라는 중요한 일을 행한 자로 평가한 것이고, 요셉을 살린 자로써의 여운도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구속사의 수순이었던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야 했던 400년의 시작을 열게 한 장본인으로 무대 위에 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일하시는 철저한 도구로 유다가 사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한 텍스트가 오늘 본문입니다. 돋보이는 것은 누구도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고대 가부장적인 가족 체계 안에서 아버지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으려는 유다의 리더십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자식들을 담보로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발군의 리더십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지도력이었습니다. 말한 것을 책임지겠다는 분명한 용기가 없는 자는 결코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유다의 선언이 동생 베냐민을 안전하게 가나안에 데리고 오지 못할 때, 내 자식들을 내놓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단순히 자식을 담보로 한 내기 정도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희생을 각오한 의지 천명이 바로 유다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은 희생의 리더십입니다. 여호수아 3:14-16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이 구절이 주는 전율하게 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먼저 선행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텍스트에서 영적 감동을 찾아보십시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요단강은 갈수기(건기)때는 맨 발로도 건널 수 있는 강이지만, 곡식을 거두는 시기인 홍수기 때는 사람이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물이 넘쳐납니다. 문제는 여호수아의 진두지휘 하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에 입성하여 여리고로 들어가는 시기는 우리나라 달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 홍수기 즉 우기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요단 도하의 행군도는 이렇습니다. 요단 강을 앞에 두고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가 선두에 섭니다. 이 선두 그룹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선봉 부대는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였고, 그 뒤에는 200만명의 이스라엘 회중들이 뒤따르는 행군도입니다. 다시 말해 법궤를 매고 있는 제사장 그룹에 이스라엘 회중은 1km 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선두 그룹의 행위를 선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제 상상의 나래를 펴십시다. 강을 건너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요단은 모맥이 넘치는 시기 즉 우기였다고 했습니다. 즉 강물이 사람의 머리를 웃도는 시기였기에 그냥 물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부터 디디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텐데 제사장 그룹이 그 두렵고 두려운 요단강에 발을 딛고 들어가는 광경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목도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제사장들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제사장들은 발을 요단강에 들여놓았습니다. 전적인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 기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갔다. 그러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다. 물은 온전히 끊어졌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넜다.” 저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물이 흘러넘치는 요단강에 발을 디디는 것이 리더십이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은 먼저 희생하는 리더십입니다. IVF 총재를 역임한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길은 세상이 전력을 기울이는 상향성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길을 향해 가는 하향성의 길이다. (중략) 그것은 권력과 통제의 리더십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무력함과 겸손의 리더십이다.” (고든 맥도널드, 『리더는 무엇을 사는가』, IVP, 28쪽) 아멘 아멘입니다. 유다는 비록 요셉을 팔아넘긴 공범이었지만, 연약한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시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백 번, 천 번을 양보하여 유다같은 존재를 도구로 삼으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도전을 줍니다. 나 같은 연약한 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리더십을 보일 때 하나님은 나도 쓰신다는 교훈 말입니다. 제가 새벽에배 기도 시간에 매일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동역자를 보내주옵소서!”입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이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붙이는 사족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동역자를 주옵소서!”입니다. 저 역시 상당히 많이 느끼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군이 상존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은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니까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정말로 힘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은 신앙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제 교단 신문에 1월호 서평을 기고했습니다. 이기주 작가의 『마음의 주인』입니다.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바꿀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과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주, 『마음의 주인』, 말글터, 164쪽) 이렇게 서평해서 보냈습니다. 출신 교회 선배께서 39세 나이에 조직교회에 청빙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이렇게 농 반 진 반의 충고를 하셨다. “이 목사, 조직교회에 부임하는 날은 정신과 병동 원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선배의 말을 듣고 나서는 어렴풋하게 그 말 뜻의 의미를 가늠했지만, 이후 지속된 조직 교회 목회의 현장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경험했다. 상식이 비상식이고, 비상식이 상식이라고 윽박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 또 그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여 교회를 전혀 교회답지 않게 하는 서글픈 일들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은 다반사로 경험한다. 젊은 나이에 이런 일들을 경험할 때면 충돌했다. 적어도 이런 온전하지 못한 일들과 타협하면서 목회하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의기(義氣)로 항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의 연륜이 깊어지고, 지천명을 넘어 이순의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마음으로 다시 새기는 것이 있다. 이기주 작가의 지론 그대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 그리고, 바꿀 수 없는 일이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다.” (이강덕, 나사렛 인터넷 신문 1월호에서) 교우 여러분! 그냥 버려두기와 그냥 받아들이기라는 반응을 체념, 혹은 포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들의 대한 다룸이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주님께 위임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동역자를 주십시오!” 이런 동역자는 자기부터 먼저 희생하고 썩어지는 밀알을 각오하는 동역자입니다. 지금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은 야곱처럼 군림하는 리더십의 소유자가 아니라 유다처럼 먼저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리더십의 소유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충실하고 또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따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비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와 치유』, 기독교문서 선교회, 147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에 국한하여 야곱과 같은 자기 고집을 먼저 내세운 그런 이기적인 사람 되지 말고 유다처럼 자기의 것을 내놓으면서 철저하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유다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유다 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요구됩니다. 우리 모두는 유다처럼 연약한 죄성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희생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야곱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는 계보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유다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쳐서 복종한 유다는 과연 누구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생명수 타오르는 인생의 사막 길을 걸을 때 갈급하여 지치고 쓰러지던 발걸음 생명수는 어디에 솟아날까 어디에 애태우던 발걸음 생명 샘을 찾았네 사막 길이 끝없어 쓰러지고 말 때에 그 누군가 다가와 생명수를 주시네 인자하신 그 모습 나의 구주 예수님 두 팔 벌려 날 안고 참 평안을 주시네 인생길이 험하나 낙심하지 마세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안에서 살면서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를 마시며 영원토록 샘솟는 소망으로 살아요 저 천국이 내 가슴 설레이게 하네요 광채 나는 주 영광 끝없이 핀 꽃무리 유리 바다 황금 길 열두 진주 문들과 주님 계신 저 천국 내가 갈 곳 저 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