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성장하지 않으면2024-03-13 18:20
작성자 Level 10

2024년 1월 10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서른 한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42:26-38

제목성장하지 않으면

 

서론)

 

오늘은 에베소서 4:13-16절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서로 회람하며 읽으라는 편지에서 밝힌 권면입니다.

눈에 띄는 권면의 내용이 일맥상통하며 꿰뚫고 있는데 바로 자라남이라는 화두입니다.

첫 번째 문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라

두 번째 문구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마지막 세 번째 구절입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라

바울이 초지일관하며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었던 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당부하면서 강력하게 권했던 신앙적인 이슈는 자라남’, 혹은 성장이었습니다.

바울이 왜 이토록 에베소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성장하라는 권고에 목을 걸었을까요?

아마도 에베소서가 저술되던 주후 58-64년 기간에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졌던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비기독교적인 일체 사상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성장을 역설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한 실례로 골로새서에서 권하고 있는 바울의 권고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역시 에베소서와 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저술되었습니다.

골로새와 에베소는 거리적으로 그리 먼 지역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골로새 지역의 교회 공동체나 에베소 지역의 교회 공동체는 거의 비슷한 교회 공동체의 문제들을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여러 이단적인 사상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정령주의천사숭배주의로마 황제 숭배 사상극단적인 영지주의금욕주의 등등으로 교회의 뿌리들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골로새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에베소 교회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이단에 맞서야 하는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베소서에서는 저자가 이단 사상과 맞서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적 반응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앞서 인용했던 바울이 에베소서 4:13-16절에서 역설한 성장이었습니다.

자라남이었습니다.

주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주후 1세기 갈라디아 지역이나오늘 우리들의 영역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퇴보한다는 말과 직결되는 것이며성장하지 않는 자가 영적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론)

 

요셉의 형 8명은 요셉에게 대단히 부담되는 미션을 하명 받고 아버지 야곱이 있는 가나안으로 복귀합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 나누었던 것처럼 8명의 요셉 형들이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과정은 엄청난 부담을 짊어진 괴로운 복귀였습니다.

애굽에 볼모로 시므온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나안 복귀 중에 중간에 머문 여관에서 그들이 가지고 온 짐 보따리를 풀어보니 자기들의 자루에 애굽으로 떠날 때 곡식을 사기 위해 가져갔던 돈 뭉치가 그대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8명의 형들은 혼비백산합니다.

28절입니다.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표준 새 번역으로 다시 2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렸다. "내가 낸 돈이 도로 돌아왔다나의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어!"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은얼이 빠진 사람처럼 떨면서서로 쳐다보며 한탄하였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

형들이 얼이 빠진 이유는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 정탐꾼 정도가아니라 돈을 빼돌린 도적으로 몰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형들은 이전에 요셉을 팔았을 때 미디안 상인들에게 받았던 돈을 나누어갔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던 경력을 갖고 있었기에 느끼던 상쇄적 죄책감이었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가나안에 도착한 8명의 형들은 아버지에게 애굽의 여정 중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설명합니다.

아들들의 설명의 요점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억류되어 있는 시므온도 방면되고곡식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흉년이 끝나려며 5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나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아들들의 요청은 대단히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이 자식들의 요구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입니다.

본문 36절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단호하게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완고함에 부딪친 장남 르우벤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고뇌에 찬 내기를 겁니다.

그것은 만에 하나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베냐민을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신의 아들들 둘을 죽이라고 압박합니다.

세상에 이런 살벌한 가정이 야곱의 가정이라니 아연실색할 정도입니다.

야곱의 가정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거의 반 협박과도 같은 강한 반응을 보인 르우벤이었지만 아버지 야곱은 끝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38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이 구절은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거절했다. “내 아들을 너희와 함께 내려보낼 수는 없다그 아이의 형은 죽었고내게 남은 것은 이제 그 아이뿐이다길에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채 슬퍼하는 나를 땅에 묻어야 할 것이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야곱의 고집을 고스란히 보고해 줍니다.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이런 고집불통의 아버지 야곱을 끝내는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극적으로 애굽으로 함께 내려가게 되지만 오늘 본문만 국한해서 볼 때야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그 고집이 철옹성이었습니다.

여기까지 42장을 살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영적 교훈 중에 한 가지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야곱이 갖고 있었던 전혀 변하지 않는 구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다.

야곱이 왜 요셉을 잃었습니까?

철저한 편애 때문입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12명의 아들들 중에 유독히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만 입혔던 케토넷 파심’ 즉 채색옷은 그 상징성이 있는 옷이었습니다.

이것은 막 입는 옷이 아니었다형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양치기 옷도 아니었다공주나 제사장이 입었던 옷과 같은 특별한 옷이었다야곱의 편애가 드러나는 옷이었다요셉은 이 옷을 형들을 찾아갈 때도 입고 간다따라서 요셉은 이 옷을 평상시에도 입은 것으로 보인다그만큼 요셉은 고된 육체 노동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으며아버지의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형들의 안부를 묻고 살피며 알리는 아버지의 전령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하경택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314-315)

야곱은 이런 무분별한 극단적 편애 때문에 요셉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편애했던 아들을 잃은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야곱은 바뀐 게 없었다는 점입니다.

요셉을 편애했던 그대로 이번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두 번째 소생인 베냐민을 품에서 놓아주질 않습니다.

지금 여타 아들들은 상황이 비상상황입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시므온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비장한 시기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애굽 총리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그리고 다른 형제인 시므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냐민과 동행해야 했던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만을 품에 안고 싶어했습니다.

여타 다른 자식들의 안위에는 터럭의 관심도 없고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시므온도 자기 자식이고베냐민도 자기 자식인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차별을 한 야곱은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구태를 유지하려는 해로운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137년이라는 노구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까요?

 

※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성장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주목할 구절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28절을 주목하십시오.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하나님이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오고가는 과정 중에 그들의 노정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꺼낸 시기가 바로 이 장면입니다.

적어도 요셉의 형들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요셉을 보십시다.

창세기 42:18절입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형들을 삼일 동안 억류한 뒤에 3일 만에 다시 형들 앞에 나타난 요셉이 형들 면전에서 선언한 메시지입니다.

요셉이 뭐라 형들에게 선포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본문 내증에는 이렇게 간단히 기록하여 더 이상 진전하지 않지만아마도 형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나 들을 법한 메시지를 요셉에게 듣고 나서 나름 놀랐을 것입니다.

이방의 땅인 애굽에서 그것도 그 나라의 2인자의 입을 통해 선언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선언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선언한 멘트가 상투적인 립 서비스였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요셉은 애굽에서 거하였던 17년이라은 인고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존재 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도보디발의 사설 감옥안에서도 하나님의 전 존재의식에 대해 눈감은 적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위기 때마다 하나님 면전에서의 생생한 기억으로 오롯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반면 형들은 요셉에 비해 하나님에 대한 의식 전무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가나안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돈뭉치 다발을 보고 얼이 빠진 사람들처럼 주문 외우듯이 토해낸 말이 하나님이 어찌 이렇게 하셨단 말인가!’의 탄식은 생생한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습관화된 탄식의 소리였습니다.

요셉 형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인 면면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까?

답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답보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족장 시대였던 이 시기에 신앙의 공급은 당연히 아버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베냐민만을 손에 쥐고 안이하게 살던 야곱에게 신앙의 성장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성장하지 않은 야곱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단절된 그에게 아들들이 신앙적인 진보를 갖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낭만의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야곱가에 일어난 불행의 단초는 야곱이 성장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불행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성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질적 성장이든 양적 성장이든 공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담임목사의 성장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회의 수준이 강대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찌무라 간조의 갈파는 그래서 옳습니다.

목사가 기도하는 만큼 성도는 기도합니다.

목사가 묵상하는 만큼 성도는 묵상합니다.

목사가 몸부림치는만큼 성도는 몸부림칩니다.

이게 영적 공식입니다.

그래서 뼈가 녹아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목회자는 성장하려고 몸부림칩니다.

누가 성장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변화산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헬몬으로 추론되는 변화산상으로 주님이 베드로야고보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마침 산 정상에 섰을 때주님이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을 보필하는 장면이 제자들에게 보입니다.

이 황홀한 광경에 도취된 베드로가 주님께 이렇게 요청합니다.

마태복음 17: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하나는 모세를 위하여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상적인 광경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께 요청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요청이 있자마자 또 다시 급잡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17:5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황홀했던 광경이 사라지고 맙니다.

베드로의 요청이 묵살된 것입니다.

왜 베드로의 요청이 거부된 것입니까?

주님의 뜻은 안주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뜻은 황홀한 곳에서서 초막집을 짓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왜 성장하지 않습니까?

누가 성장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행하신 말씀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고 눈에 보이는 유익과 영적 카타르시스에 만족하려는 안일함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원흉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일찍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전인격을 취하고 바쳐서 영광스럽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영적 침체와 치유기독문서선교회, 81-82)

로이드 존스가 말한 전인격을 취한다고 했을 때전인격은 지..의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 주신 지정의를 다 동원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려면 결코 내가 생각하는 안이함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합당하게 살아내야 지정의를 통해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헌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만족을 위해 안일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영적 성장은 꿈도 끄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이 끊어진 자에게 무슨 희망과 영적 비전이 있겠습니까?

사무엘상 3:1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무서운 경종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야곱에게서 영적 진보가 멈춘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만을 편애한 지극히 어리석은 침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 야곱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공급되지 않았고결국 그 은혜의 단절은 아들들에게도 영적인 단절로 이어진 악순환 고리기 된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0년 전, 2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릅니까?

단 한 발자국이라도 보폭의 거리와 속도가 달라졌습니까?

그렇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 일보의 변화가 없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미 그런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어 중에 이런 시절(詩節)이 있습니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나희덕사라진 손바닥-성느티나무 중에서문학과 지성사,95)

저는 시인의 이 말을 100% 믿습니다.

파주에서 목회할 때 교회 근처에 있는 이율곡 선생의 사당인 자운서원을 가끔 들려 산책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시인의 거론한 것과 같은 느티나무의 형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번개 맞아 반으로 조각나 있는 느티나무는 죽지 않았습니다.

번개도 뿌리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토막 났지만 뿌리가 여전히 살아 있는 그 느티나무는 버젓이 살아서 잎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에게나 시련이 있고시험도 있으며고난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밑힘을 내 신앙의 저력으로 믿고 주님과의 교제와 단절이 없이 살아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이 밑힘인 교우들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성장하게 하는 영적 동력임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 밑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한없이 크신 주의 사랑을 어디에다 비하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비할 수가 없구나

우리의 기도 응답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엎드려 소원 간구하오니 은혜 내려주소서

절망할 때는 소망 주시고 나의 앞길 인도하니 푸른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셔라

오 나의 사랑 나의 소망 되신 예수님 내가 영원히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내가 영원히 영원히 찬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