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서른 번째 강해)
본문 : 창세기 42:1-25 제목 : 울 수만 있다면
서론)
시편 150편 중에 총 7편의 참회시가 있습니다. 6,32,38,51,102,130,143편을 일컫습니다. 이 7개의 시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6편은 부제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시의 저자를 꼭 다윗을 특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의 저자가 중증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스스로 밝힌 질병의 증상은 무척이나 심각했습니다. 시편 6: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인의 상태는 뼈가 떨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쳄’은 사람의 육체적인 힘과 건강의 자리를 상징하는 단어이니까 시인의 질병 상태가 대단히 중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토로입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의 주목할 것은 시편 6:2절에서 시인이 단순히 육체적인 심각한 질병에 노출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시인은 영적으로도 병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척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아말’은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영적인 부분으로 인해 야기되는 ‘마름’(dry)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편 6편의 시인은 영육의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중증의 고통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인이지만, 그가 연이어 고백하고 있는 6-7절은 독자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시인이 토해낸 고백을 보면 어떤 면에서 상징적인 은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한 심정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에서 이 표현은 정말 압권입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인에게 임한 질병은 대적들로 인한 상심 때문에 생긴 질병이었습니다. 특별히 심각한 영적 범죄를 저질렀기에 당하는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대적들이 주는 공격으로 인해 온 치명상 때문이었는데도 마치 자기의 죄때문이라고 적용하듯 시인은 밤마다 자기 침상의 요를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참회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그러니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이렇게 밤마다 눈물로 호소하고 애통한 시인은 6:8-10절에서 갑자기 분위기 반전을 이룹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인은 선포합니다. 자신을 조롱한 일체 대적들이 떠나갈 것과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분위기 반전을 이루며 시편 6편을 마감합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 반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답을 울음에서 찾습니다. 믿음의 주체이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께 울 수만 있다면 그 울음의 능력이 그렇게 만드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도 성경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본문입니다. 애굽은 물론 인근 각 처에 7년 기근이 시작되자 야곱이 거주하던 가나안도 사정은 매일반이었습니다. 야곱은 상황의 긴박성을 알고 아들들을 채근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 가지고 오라는 채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채근에 요셉의 형 10명은 애굽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막내 동생인 베냐민은 동행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요셉의 10명의 형들이 애굽에 도착하여 애굽 인근 나라들에게 양식을 매매하는 총감독인 총리대신인 요셉에게 엎드려 절을 하며 양식 매매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형들이 절하는 것을 본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감추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 플랜 A를 가동합니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세웁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형들은 한사코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프로젝트를 세운 요셉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플랜 B를 가동합니다. 애굽에 동행하지 않은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추상같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10명 중에 한 명을 애굽에 볼모로 남겨두고 9명이 가나안으로 돌아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면 너희 무리들이 정탐꾼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러 온 자들임을 믿을 테니 막내 동생을 데려 오라는 명이었습니다. 애굽의 실세인 요셉이 세워 놓은 계획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10명의 형들은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게 된 원인이 13년 전에 요셉을 버린 죄값을 받는 것이라고 자책하는 르우벤은 할 수 없이 시므온을 애굽의 볼모로 남겨두고 동생 8명과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계획을 세운 요셉은 볼모로 남는 시므온의 눈을 결박하여 구금시키면서도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9명 형들이 보따리 짐 안에 그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 가져왔던 돈과 더불어 아버지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채우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을 보면 얼마나 요셉이 형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이런 격동의 아픔을 겪게 된 형들은 작금 닥친 황당한 일의 원인이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자기들끼리 때늦은 후회를 하며 회개하는 말을 주고 받는데 형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요셉은 감정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데 본문 24절이 증언합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형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요셉은 감정을 추스릴 수 없어 형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여 쏟아지는 눈물을 흘렸다고 창세기 기자는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밖에 나가서 울었을까요? 본문에 관한 집요한 연구가 그 답을 제시합니다. 요셉은 형들과 함께 있었던 공간에서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었고 또 그것을 증명해 내기 위해 형들의 언어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세웠다고 본문 23절이 증언합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형들은 요셉을 대단히 두려워하며 가나안으로 향하면서 서로에게 주고 받았던 말 중에 요셉을 뭉클하게 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에서 주석 하나를 읽겠습니다. “요셉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야콥 마이어스의 분석에 의하면 요셉은 형제를 다시 찾게 되었기에 울렀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르우벤의 재 발견 때문에 울었다. 요셉은 형들의 대화를 통해 지난 날 형들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요셉은 맏형 르우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맏형 르우벤만은 그러한 형들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447-448쪽) 요셉은 자기를 이해하고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던 맏형 르우벤의 노력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울 때는 언제입니까? 동양적인 사고로 접근하자면 인간은 희노애락을 느낄 때 웁니다. 기쁠 때, 화날 때, 슬플 때, 즐거울 때 감정의 폭이 자라나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서적인 울음은 조금은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눈물은 마음을 이해할 때 흘립니다.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상당히 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먼저 성경적인 대표적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9:35-3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주께서 고통의 고통을 겪고 있던 민초들을 위해 치유 사역을 행하시면서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셨다는 복음서의 증언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민초들을 보셨던 마음을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으로 마태 기자는 기술했습니다. 이 단어는 여러 차례 다른 설교를 통해 전했던 그대로 ‘내장이 끊어지듯이 아프다’라는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때 주어지는 감정의 폭입니다. 내장이 끊어지듯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의 결과물이 울음입니다. 주께서 이 울음의 반응을 치유 사역으로 되갚아주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한 구절만 더 나누십시다. 요한복음 11:33-35절을 합독해 보십시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베다니에 살던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조금 그 장소에 늦게 도착한 예수님에게 원망 섞인 말로 주님이 여기에 조금 일찍 도착하셨으면 내 오라비기 죽지 않았을 거라는 자조적 탄식을 하며 나사로의 두 여동생이 눈물을 흘리고, 같이 있던 자들까지도 울자, 그가 묻힌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시고 그 현장으로 이동하신 주께서 보이신 반응이 눈물을 흘리신 것이었다고 증언한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기 전에 갖고 계셨던 감정이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갈릴리에 살고 있는 민초들을 보시고 갖고 계셨던 ‘내장이 끊어지는 아픈 마음’이었던 바로 그 마음이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신 주님은 내장이 끊어지는 마음으로 아파하신 뒤에 함께 울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또 하나, 주목할 단어는 ‘울다’라는 단어입니다. 33절에 기록된 마르다, 마리아, 유대인들이 울었다는 단어는 ‘흐느끼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클라이오’인데 반하여, 예수께서 우셨다고 표현한 단어는 ‘다크뤼오’라는 단어를 씀으로 구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크뤼오’는 ‘대성통곡하다’는 의미의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숨 죽여 우는 울음이 아니라 소리내 우는 울음이 ‘다크뤼오’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 없음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셨지만, 그것보다 더 위에 있었던 감정은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 밑으로 들어가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울 수만 있다면’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설교 제목을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렇게 바꾸어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불쌍히 여길 수만 있다면’ 혹은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라고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불쌍히 여길 수만 있다면’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만 한다면’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울 수만 있다면 희망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진단한다면 주님이 선포하셨던 말씀 그대로의 시대입니다. 마태복음 11:15-17절을 복기 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는 이 구절을 아주 익히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수께서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화인 맞은 세상을 향하여 비난한 메시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호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라고 비난한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딴지를 걸었던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를 향하여 비난한 메시지입니다. 결국 이렇게 역설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호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라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이들이 오히려 세대가 강팍해져 가도 본인들은 끄덕하지 않고 가슴을 닫아버린 이율배반자들인 바리새인들이라고 주께서 힐난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인 도와 율례를 가리치는 자들이 심장이 멎어 있다고 지적하신 셈입니다. 기독교는 이성적인 율법을 갖고 달려가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께서 흘리셨던 울음과 불쌍히 여기셨던 심장을 갖고 동행하는 삶의 모임입니다.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암묵적으로 침묵하고 그것을 용인합니다. 하지만 내게 무언가를 헤집는 일로 판명되면 기를 쓰고 싸우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 방침은 불쌍히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맏형의 고백을 듣고 울었습니다. 울음에는 치료하는 광선이 있습니다. 울음에는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울음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백했던 고별설교를 저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사도행전 20:31-38절을 일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결론)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미국의 부흥사 D.L MOODY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역자였습니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영어 단어 스펠링이 30군데 이상 틀리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무디는 크리스마스라고 쓴 글에 ‘T’라는 단어를 빼놓고 ‘CHRISMAS’ 써서 지성적인 동료 목사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무디를 비난하는 목사들을 보자 어떤 신자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무디 목사님의 설교에는 ‘T’는 없어도 우리를 주께로 인도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없는 눈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려분! 2024년 세인교회가 울 수만 있다면, 세인교회의 담임목사와 여러분이 주님과 영혼을 위하여 울 수만 있다면 우리 교회는 이길 것입니다. 승리할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을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했던 그는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도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제물 되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