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 나는 크리스천 부모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모의 위상을 생각하고 새겨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본론)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17장 제일 첫 번째 지명으로 거론된 ‘에브라임’이라는 지명은 시작부터 뭔가 개운치 않습니다. 적어도 에브라임 지파는 사사기 안에서는 아주 기분 나쁜 지파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을 때 우리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뒷북 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입다에게 저울질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던 기분 나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이렇게 그 기분 나쁜 지파인 에브라임이 17장 서두에 등장합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지파에 속한 한 사람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등장합니다. 1, 4절에 기록된 ‘미가여후’였습니다. ‘미가여후’는 ‘야훼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같은 분은 이 땅에 없다.’라는 뜻의 이름은 걸출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름값을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미가가 자기 엄마의 재산을 도둑질하였다는 보고입니다. 그가 도둑질한 내용은 은 1,100 세겔이었습니다. 당시 노예의 몸값은 20〜60 세겔 정도였고, 노동자의 1년 수입이 5〜15 세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가가 엄마에게서 훔친 돈 1,100 세겔은 제사장이 110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미가의 어머니는 어마어마한 재력가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액수를 도난당한 것을 안 미가의 어머니가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내용이 2절에서 보고됩니다. 다시 2절 전반절입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돈을 잃어버린 미가의 어머니는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그 도둑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면 그 저주가 효력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다 보니, 막상 그 대상자였던 미가는 겁이 났습니다. 결국, 미가는 그 돈을 훔친 자가 자기임을 이실직고하고 돈을 어머니에게 토해 놓기에 이릅니다. 아들이 이렇게 불법적인 행동을 했다고 이실직고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정상적인 어머니라면 아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처벌을 내리거나 무언가 물리적인 처벌을 내림으로써 아들이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미가 어머니의 반응은 아연실색하게 합니다. 본문 2절 후반절부터 4절까지를 읽어 보십시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미가의 어머니는 엽기적인 일을 자행합니다. 일단은 아들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도리어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내 아들이 야훼께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제가 미가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야훼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주문 외운 것이라고 치부한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사사기 17장이 배경이 되는 시대는 삼손 사사 이후 시대이기에 사사 후기 시대라고 해석하는데, 이 시기야말로 야훼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극단적 랜덤의 시기였기에 미가의 어머니가 부른 야훼의 이름은 잡신 중의 한 명으로 부르던 이름에 불과하였기에 말 그대로 미가의 어머니가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 기도문은 주문이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또 하나, 엽기적인 일은 아들이 뉘우치고 가져온 1,100 세겔이라는 엄청난 물질을 받은 미가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 이 돈은 내 아들로 하여금 신상을 만들게 하려고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던 것이다.” (‘메시지’ 번역) 이렇게 말한 미가의 어머니는 은화 200개를 우상 조각가에게 주면서 아들을 위한 신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 2f-4절까지의 줄거리입니다. 도둑질을 했기에 죽도록 야단을 맞을 것을 예상했는데 야단은 고사하고 자기를 위해 신상을 만들어 준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고양된 미가는 오십보백보의 엽기적 행태를 자행했음을 본문 5-6절이 이어 보고합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 미가에게는 개인 예배실이 있었다. 그는 에봇과 드라빔 우상을 만들었고, 아들 가운데 한 명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했다.” 이 본문에서 고발하는 사사 후기 시대의 영적 망가짐의 행태가 무엇이었을까요? 너무 많지만 몇 가지만 추려 보겠습니다. ⓵ 이 시대의 제사(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적 이벤트였다는 점이 보입니다. ⓶ 개인 사설 제단을 만들어 야훼 신앙을 사유화하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참담한 짓을 자행했습니다. ⓷ 율법에서 대단히 엄격하게 제정해 놓은 제사장 임명을 개인이 마음대로 자행하는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행했습니다. 오죽하면 사사기 전문학자인 전성민 교수가 본문을 이렇게 일갈했겠습니까? “미가는 자기 집안 종교를 완성했다.” (전성민,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267)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얽힌 성서적, 신학적 해제입니다. 이런 성서신학적인 해제는 본문 이해에 필수적인 전 단계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성서신학적인 해제가 아니라, 어버이 주일에 맞추어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크리스천 부모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올바른 부모의 모습인가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왜 본문에서 미가는 영적으로 망가진 극단의 삶을 보였을까요? ※ 미가 어머니의 우선순위가 미가였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은 서늘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부모 중에 자기 자식이 소중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교의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심각한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자식을 홀대하거나 방치하거나 방관하는 부모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더더욱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생각함은 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생각함과 사랑함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자식이라는 두 관계를 저울질할 때, 어머니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는 자식 편이었고, 자식의 손을 들어줍니다. 인지상정이요, 또 어떤 경우에는 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정신 구조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을 굳이 뜯어고치려는 마음을 오래전에 바꾸었습니다. 설교야 어쩔 수 없기에, 목사의 자존감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종용하지만, 교우들이 순종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이 명제를 갖고 여전히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라고 핏대를 올리며 역설하고 싶은 마음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까지 접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일까요? ※ 자식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식들을 하나님도 우선순위로 책임지시지 않는다는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자식들을 우선순위 시 하는 방법을 암묵적으로 동의하십니다. 우격다짐의 자세가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식으로 조금 더 쉽게 접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인 내가 자식들을 책임지고 있는 한, 나에게 그 책임을 끝까지 지라고 용인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부모인 내가 아무리 자식을 우선순위로 책임진다고 하지만, 내가 결코 책임질 수 없는 시기와 한계가 오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럴 때, 대다수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비로소 그때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 힘과 능력으로 자식을 바르게 인도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그때 때늦은 후회와 회한과 눈물범벅이 되어 주님께 손들고 나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미가가 망가진 이유는 그의 어머니의 우선순위가 미가였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세밀히 살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야훼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순리이자 마땅한 수순으로 미가도 야훼 하나님과는 1도 관심이 없는 삶을 당연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 신상을 만들고 자기를 위해 우상숭배의 진원지를 사설 집단에 만들고, 이후에는 자기를 축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사설 제사장까지 맘대로 임명하는 만행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가의 죄는 어머니의 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고, 그러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가는 어머니의 토플 갱어가 되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체들을 심방을 하거나, 만남을 갖거나, 상담을 요청하면서 지체들이 제게 자녀들의 복을 요청하며 중보를 부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이기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마땅히 목회자가 해야 하는 사명이며, 사역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우들에게 오늘은 설교를 통해 제 마음을 진솔하게 전합니다. 저는 바보 목사가 아닙니다. 동시에 저는 복채를 받고 주문을 외우는 무당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종교인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이 제게 요청하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중보할 때, 결코 무대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섭섭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요청하는 자녀들을 위한 중보 요청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사족을 달며 기도합니다. 한 번도 이 일을 누락하거나 삭제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무개 교우가 자녀를 위해 이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제 기도를 아시지요? 아무개에게 그런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신앙의 태도가 전제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아무개의 기도가 응답 될 수 있는 신앙적 삶의 여백이 먼저 만들어지게 하옵소서. 그렇치 않을 때,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기도의 응답인 것을 종은 인정합니다.” 이 만들어짐이 전제되지 않는 기도는 사기입니다. 이 전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이루어달라고 외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윽박지르는 폭력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는 마치 오늘 본문에서 마치 주문을 외운 미가 어머니의 주술적 주절거림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버이 주일을 맞은 우리는 미가와 미가 어머니 스토리를 통해 반면교사를 삼아야 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 자식은 부모가 하나님께 진솔하게 살았던 신앙적 삶까지만 자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교훈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상투적인 멘트이겠지만 되살려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의 영적 성장의 모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밀양에서 목회할 때 섬기던 교회 지체들이 벼를 심는 시기가 되면 논으로 나가 땀 흘리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벼 모판이 심어져 있는 곳에 가서 기도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판을 관리하던 노 집사님이 제게 했던 말이 오롯이 있습니다. “목사님, 가냘프게 보이는 이놈들이 일 년 농사의 효자들입니다.” 왜 아니 그러하겠습니까? 모판의 생장 상태가 그 모판에서 자라나는 벼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대만 신학자 송천성 박사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이다.” 송 박사가 어머니라는 존재를 얼마나 신학적으로 그 위상을 높이 평가했는지 가늠할 수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라는 모판을 기초로 자란 자식이 어머니의 신앙적 위상까지만 자란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며 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아주 가끔 성경에 기록된 한 구절로 인해 매우 유감스러워 깊은 우울감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8:1〜3절을 마지막으로 읽어드립니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성경이 사무엘의 아들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개한 구절입니다. 큰아들은 요엘, 둘째 아들의 아름은 아비야입니다. 사무엘은 큰아들이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갖고 살기를 바랐고, 작은아들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갖고 살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그들은 이름의 의미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의 아들들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사무엘상 8:5절을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성경이 자세한 보고를 생략했기에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한나가 사무엘을 얻기 위해 행했던 신앙의 선한 모판 역할을 사무엘은 유감스럽게 하지 못한 것 같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어 유감천만입니다. 얼마 전, 이요한 목사와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다가 아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자랐고, 아버지의 설교를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설교는 본받을 게 많지만, 내가 목회하는 세대와는 유리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 보여 특히 내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 아버지의 설교를 반면교사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고등부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 원고 작성을 마쳤고, 아이들에게 그 설교 원고를 기초로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강단에서 내려왔는데 순간, 내 안에 고스란히 이강덕 목사가 담겨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배움이 얼마나 무섭고 또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갖고 있는 영적 수준까지 자랍니다. 그러기에 크리스천 부모인 나의 영적 수준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것이며, 긴장되는 것인가를 날마다 각인해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그럭저럭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무늬만 그리스도인 신자로 머무르기를 바라는 교우들은 오늘 담임목사의 설교를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자녀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하게 서기를 바라며, 성장해 주기를 마음이 있다면 오늘 담임목사의 설교를 뼛속에 새겨야 합니다. 더불어 자녀들이 신앙적인 ‘바로 섬’의 영역에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 부모로 살아내야 하는 미션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가문에서 사무엘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의 가문에서 절대로 사무엘의 장자와 차자인 요엘과 아비야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의 가문에서 미가와 미가 어머니와 같이 망가진 자들이 배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여러분이 신실한 크리스천 부모로 서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오늘 설교 후 찬송가로 577장을 택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의 큰사랑 바다보다 넓으시고 산보다도 높은 사랑 하나님의 경외하신 아버이의 크신 사랑 힘들거나 괴로울 때 기도하신 어버이 즐거운 일 함께 웃고 기뻐하신 그 얼굴이 긴긴 시간 흘렀으나 마음속에 남았구나 재미있게 가르치신 귀한 성경 말씀이 기쁜 노래 찬양하며 예배드린 그 시절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찌 평생 잊으리까 후렴) 내게 주신 크신 은혜 하나님을 찬양 하세 주님 은혜 감사하며 영광찬양 할렐루야 내 자녀들이 내가 이 땅에 없는 그날, 찬송가 577장을 눈물로 찬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어떤 복을 받은 것보다 가장 위대한 복을 받은 크리스천 부모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복을 세인 공동체의 가정이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