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첫 번째 강해) 제목: 사랑이 전부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4:7-8 서론) 사랑 하나면 충분하다고 외치며 살아온 동기 목사가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고 벌써 7집의 시집을 출간했을 정도로 말 그대로 사랑에 미친 친구인데 얼마 전에 보내준 7집에 담겨 있는 시 한 편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수줍음/세월 몇 겹 둘러도/발 동동 구름/매일 따라갔어도/설렘/셀 수 없이 고백했어도 황홀함/긴긴날 익숙한 향기였어도/고마움/끝없는 함께의 소유였어도/아, 끝까지 가는 게 사랑이다/끝까지… (박경철, 『사랑한다는 고백에 맘 설레는 사랑꾼들을 위하여』, 파랑새 미디어,141.) 절규처럼 느껴지는 친구의 외마디가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아, 끝까지 가는 게 사랑이다. 끝까지… 이렇듯 사랑의 찬미는 언제나 들어도 마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갖고 있는 단어 중에 가장 위대한 용어인 게 분명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싫증 나지 않게 하는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밀어입니다. 인간의 용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단어는 성서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표현한 요한일서 기자의 이 명제 때문에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인간이 갖고 있는 단어 중에 참 귀한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에 하나님이 배제되면 완벽한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이기적 사랑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요한일이삼서 즉 요한서신을 주일 예배를 통해 강해하며 설교하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요한서신에서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사랑의 本體(본체)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론) 듀크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미스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보고를 자신의 주석서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훌륭한 서신서이다. 이 서신서는 찌든 심령을 고양시킬 수 있다. 더구나 요한의 독특한 스타일과 표현 양식을 지니면서 아름답고 고아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 1,2,3서』, 21쪽) 루터의 인용문을 보고 있노라면 극찬에 가깝습니다. 그만큼 요한서신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기대감이 큽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라, 요한일서의 서론적인 메시지는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유대의 독립군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의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독립의 출발을 알렸지만, 베시파시아누스 로마 황제는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독립군들의 반란 진압을 명했고, 결국 유대 독립군들은 그에 의해 AD 70년에 초토화되고 약 110만 명이 사망하는 거의 궤멸에 가까운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AD 70년에 벌어진 유대-로마 전쟁의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유대 독립을 무력으로 진압한 티투스는 아버지 베시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곧바로 그에 이어 로마의 10대 황제로 즉위하여 로마제국을 이끄는 수장이 됩니다. 하지만 티투스가 즉위 2년 만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제 11대 로마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기독교는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되었음을 교회사가들이 증언합니다. 도미티아누스의 즉위 후 기독교의 박해 시기를 학자들은 주후 81〜96년으로 산정합니다. 이 시기에 유대교도 핍박을 당한 것은 물론, 곁들여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까지 더불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 종교의 탄압은 실례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비록 본인들이 살고 있는 땅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땅, 가나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피에는 유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었기에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드리는 성전세 반 세겔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드렸습니다. 멤버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경제적 가치가 종교세라는 명목으로 이스라엘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곱게 보지 않고,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의 성전세 납입을 법으로 막아버립니다. 성전세의 출혈로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 줄어든다고 여겼던 도미티아누스는 이렇게 유대 정신을 말살시키는 것부터 핍박을 자행했습니다. 이런 핍박의 모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반로마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자로 여겨 색출하고 무자비하게 핍박을 가하며 고난을 가했습니다. 요한도 바로 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는 핍박의 당사자가 될 정도로 크리스천들에게 임한 핍박도 거셌습니다. 교회 외적으로 이런 살벌한 시기가 요한서신이 기록될 당시였던 주후 1세기 후반인 90〜100년 사이였습니다. 이 한 가지 핍박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에게 심대한 위기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런 위기적인 상황이 교회 공동체에 엄습하다 보니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을 흔드는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과 영지주의라는 이단주의자들이 창궐했고, 이들이 전하는 거짓된 교리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현실적인 영적 상태였습니다. 이런 힘들고 어려운 과정에 맞닥뜨린 상당히 많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신앙의 테두리에서 이탈하는 배교가 서슴없이 자행되었습니다. 배교를 부추기는 자들이 바로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전한 부적절한 교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었고, 그분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성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일서 2:22절은 증언합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한일서 4:2절도 고발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교리적인 오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것을 물론, 대 사회적으로 저들은 윤리적 상황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치명적 오류는 대사회적으로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형제에 대한 사랑을 모독하거나 폄하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일서 저자는 사랑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사랑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소상히 밝힐 필요가 생겼던 것입니다. 사랑을 폄훼하고 인정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저자가 밝힌 반론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구절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목하고 명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구절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대와 내가 새겨 할 구절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표현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 하나님이 배제된 사랑의 행위는 언제나 위험하다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요한일서 저자가 본서 안에서 줄곧 외치고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사랑이 완전하다는 역설을 요한일서 저자가 선언한 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입니다. 양 백마리 중에 한 마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양을 키우는 목자가 곧바로 보인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누가복음 15:4절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경악할 만한 문구가 보입니다. 집을 잃지 않고 온전히 목자의 음성대로 대열해서 이탈하지 않은 양이 99마리인데, 대열해서 이탈한 한 마리 양을 찾겠다고 목자가 찾아 나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99마리 양의 상태입니다. ‘들에 두고’ 다시 예민하게 보십시다. 99마리를 안전한 양 우리 안에 집어넣고 1마리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99마리를 들에 그냥 놔두었다는 구절이 경악할 만합니다. 들은 이리와 늑대, 그리고 육식동물들이 공격하면 속수무책 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해서 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한 목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설교자인 저는 이런 이들의 공격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99마리의 시각을 보면 1마리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적 가치로 볼 때 백번 옳고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양 1마리를 잃은 목자의 시각을 견주어 볼 때 목자에게는 지금 경제적인 수지타산의 계산, 자본주의적인 스펙트럼으로 평가하는 이해타산의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 목자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의 온 머리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온통 생각은 사랑했던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천착함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누가복음 15:1〜7절에 기록된 잃은 양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촌철살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3:16절의 의미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감동적이고 놀랍고 놀라운 은혜를 보편화시킴으로 인해 그 감동을 약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1인칭 객관화를 시키며 어마어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바로 그대가, 바로 내가 99마리의 양이 아니라 대열에서 이탈한 잃은 양 한 마리였기 때문인데, 바로 나 때문에 주 예수께서 오셨고, 오신 예수께서는 미친 듯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직 나 하나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특별한 경우나 예배에 이렇게 축도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는 전혀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라는 극한 고통을 지실 이유가 없으셨지만 오로지 나 한 사람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지만 나를 사랑하신 것과는 견줄 바 없어 아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엄청난 아가페의 사랑과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과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신실한 사랑을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언제나 그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걸음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저는 세인 지체들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속삭임을 주일 예배를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아내에게 전언받았습니다. 서태원, 최주현 집사 가정이 조만간 이사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가능하면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하기 위해 계획 중에 있습니다. 중보를 부탁드립니다. 서태원 집사 가정이 새로운 장막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이사할 집에 대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단독주택이어야 하며, 마당이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왜? 키우고 있는 개 때문입니다. 개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민원이 나지 않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개 때문에 집을 얻기가 쉽지 않으면 개를 정리하면 된다는 생각이 저의 상식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최주현 집사에게 종용하지 않습니다. 왜요? 서태원, 최주현 집사는 키우고 있는 개가 개가 아니라,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개가 동물이 아니라, 식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냐고 반문하지 마십시다. 키우고 있는 개를 개가 아니라 식구로 생각하는 것은 일반의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개에 대한 시각이 아니라, 그 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미물이라고 여기는 개를 사랑하는 것도 일종의 사랑 방법인데, 하물며 우리는 만 입이 있어도 감히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민감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사랑이니 그 사랑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무슨 재론의 여지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시골에서 목회하던 레만 목사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항상 그를 괴롭혔습니다. 해서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소에서 갑자기 아내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먹다가 순간 영감이 떠올라 감동의 멜로디를 얻게 되었고 즉흥적으로 가사까지 써 내려갔습니다.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 The guilty pair, bowed down with care, God gave His Son to win. His erring child He reconciled, And pardoned from His sin.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It shall forever more endure.” “하나님의 사랑은 입술과 펜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아주 높은 별을 초월한 사랑이고, 가장 낮은 지옥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해서 죄지은 짝들은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기도록 아들을 주셨습니다. 범죄 한 이들은 주님으로 인해 화해했고, 자기들의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오 하나님의 사랑이여, 얼마나 부요하며 순결한지요. 얼마나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력한지요. 하나님의 그 사랑은 더욱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송가 304장은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요한서신 여행을 통해 세인 교회 교우들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눈뜨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전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독생자들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보냈도다/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서로 사랑하면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