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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4)2024-04-19 11:48
작성자 Level 10

2024년 3월 10일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설교

 

제목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4)

본문사도행전 9:43

 

서론)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개신교의 영성을 더 진보시키고 성숙해지는 절기로 사순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새벽에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요일마다 정해져 있습니다.

목요일이 되면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하는 데그중에 7번째 기도 제목이 이렇습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큰 아픔인 그리스도인들의 말씀과 삶이 유리되지 않게 하옵소서.”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설정할 때제 마음도 무겁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이 제목은 기실회피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자 민낯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가능하면 숨기고 싶고감추고 싶고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이기에 이런 제목을 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말과 삶의 유리됨은 너무 적나라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이기에 물러설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그러기에 시급한 기도 제목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당신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가장 반대편에 서 있던 지도자 그룹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맹폭한 저주 메시지입니다.

무려 7번에 걸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선포했던 관용구는 이러했습니다.

화 있을진저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무서운 질타요 공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도록 맹폭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던졌던 주님의 일성 중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어느 부분입니까?

주님으로부터 무섭도록 집요하게 질타를 당했던 대상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에 대한 일침 중에서 그들이 했던 말에 대해 주님도 부분적으로 긍정했던 인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에 대해서는 지키라고 선언하신 바로 그 부분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렇게 긍정적으로 권하였을까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셨던 율례들 즉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지키는 것은 마땅히 신자가 해야 할 도리이자 의무임을 주님도 인정한 것입니다.

다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말과 삶이 유리(遊離)되어 있는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질타하시고 비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시기만 이런 문제가 있었는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때 이후, 2,000년이 훨씬 지난 작금에도 이런 이율배반적인 신자들의 유리됨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섬기면서 도대체 사순절의 의미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가를 4번째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론)

 

사도행전 9:32절은 베드로가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던 룻다로 내려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데이미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보고이기도 합니다.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데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으로 임한 박해 때문에 이동했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즉 집사와 같은 이들이 흩어져 정착했고 바로 그곳 룻다에서 복음을 증언한 결과이미 믿는 자가 생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러 룻다에 내려간 베드로는 애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성도를 만납니다.

이 애니아는 8년이나 중풍으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 있는 자였습니다.

8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워지내야 했던 애니아는 마침 룻다에 내려온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치유 받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누가는 사도행전 9:33-35절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이 구절에서 주목할 부분은 35절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룻다는 물론 그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론까지 그 소식이 퍼져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룻다에서 엄청난 주의 기적을 창출했던 베드로는 이어서 룻다에서 불과 18km 정도 떨어진 욥바로 동선을 옮깁니다.

베드로가 욥바로 이동한 이유와 더불어 경험했던 정황을 사도행전 9:36-4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룻다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그곳에서 18km 지점이기에 그리 멀지 않은 욥바 항구까지 베드로가 일으킨 기적의 사역이 알려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욥바에 살고 있었던 암사슴이라는 뜻을 갖고 살면서 욥바 지역에서 적지 않은 선행과 구제를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다비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제자가 병들어 죽었고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씻어 다락방에 안치했습니다.

다락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페론은 통상 2층 구조의 집에서 2층 공간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런 가옥의 구조에 따라 다락이 휘페론이지만이스라엘 공동체는 통상 이 다락이라는 공간을 단순히 지엽적인 2층 공간으로만 여기지 않고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장소 즉 공간으로 생각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던 곳이 다락방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던 곳도 다락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셨던 곳도 다락방이었고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했던 장소도 다락방이었습니다.

아마도 추론하건대 욥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아낌없는 희생과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다비다가 죽었지만그녀의 시신을 다락방에 안치한 이유는 그녀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더 더군다나 룻다에서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에게 욥바 심방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 타당성이 더 커 보이는 것은 억측이 아니라 영적인 공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졌음을 의사 누가는 가감 없이 보고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다비다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우리 교우들이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42절입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욥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기적을 보고하면서 42절에 기록한 형용사가 눈에 띕니다.

홀로스’ 즉 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욥바에 살고 있는 온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는 보고 말입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욥바 사람들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들었고성경에 보고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다비다를 직접 찾아와 확인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믿지 못할 일을 눈으로 확인한 후, ‘많은’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었다고 누가는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이 즈음에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9:35절을 만납시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이번에는 9:42절을 다시 복기합시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이 구절을 같이 놓고 보면 한 가지를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위상입니다.

룻다사론욥바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이른바 베드로 신드롬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은사 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어느 이단 공동체에서 중풍 병자가 일어나고귀신이 쫓겨 나가고여기저기에 각종 은사가 나타나고 하는 소문이 돌면벌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이야기를 흔치 않게 들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은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류의 반열에 줄 서기 위해 머리를 들이밀면서 그 사역을 배워 보려고 목을 건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입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는 구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0여 년 전에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어떤 여자가 나타나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계시했다고 말한 내용 중에 2014년 12월 14일 북한과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계시를 선포하면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을 때거기에 동조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으로 일어났던 것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정작 그 말은 한 그 여자가 전쟁 때문에 해외로 도피했을 때더 많은 신빙성을 갖고 그가 말했던 혹세무민의 거짓 예언에 열광했던 이들이 한국교회 안에 버젓이 존재합니다.

근래에는 전도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어떤 청년이 이런 사역을 통해 많은 이적을 일으킨다고 해서 거기에 또 열광하는 이들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오늘 본문 정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거짓을 선동하는 무리들의 말에도 비평적 성찰 없이 굴종하는 데하물며 현장에서 8년째 투병 중인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자기가 누워 있던 침상을 정돈하는 것을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던 이들이 갖게 된 치유자 베드로 사도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엄청났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존경하던 이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마을 공동체의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그 존경하는 이를 다시 살린 베드로에 대하여 욥바 주민들이 바라보게 된 존경심경외감 등등은 이론적으로 설명 불가일 것입니다.

이 상상을 전제할 때본문 43절은 깊이 묵상할 텍스트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룻다에서 애니아를 고친 베드로가 곧바로 동선을 욥바로 옮긴 것과는 달리 베드로는 욥바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고 누가는 말해줍니다.

대중적 인기 극점에 있었던 베드로가 욥바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면 아마도 욥바 지역에 살고 있었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라는 성인을 근처나 지근 거리에 모시면서 뭔가 그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혹은 더 큰 은혜의 고갱이를 얻으려고 경쟁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날이라는 단어가 욥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희망적인 날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의 위상과 인기 척도를 감안할 때베드로는 욥바 지역에 살고 있던 상류층이나 화이트 컬러 군()에 속한 이들의 게토 지역에서 자기의 인기를 만끽하며 편안하게 대우받으며 욥바에서 체류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43절은 충격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으면서 머물렀던 장소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두장이의 집이었습니다.

무두장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뷜세우스를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쉽게 번역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여러 날 동안 가죽 제품을 만드는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렇습니다.

뷜세우스는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오늘가죽 제품을 만드는 자는 장인입니다.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이 선택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뷜세우스는 아주 나쁜 비유이겠지만 조선 시대의 천민 계층이었던 백정망나니노비 등등의 신분과 같은 직종이 바로 가죽 제품을 만드는 뷜세우스’ 즉 무두장이였습니다.

결국 주후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자들에게 뷜세우스는 소위 말하는 불가촉천민이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모든 사람들이 가장 부정한 존재라고 여겼던 이들이 무두장이였다면 욥바 지역에서도 시몬은 모든 사람들이 접촉해서는 안 되는 기피 인물이었을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그런 이의 집에서 여러 날을 베드로가 머물렀다는 누가의 보고는 충격을 넘어 기괴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성찰한 이재철 목사의 글 하나를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무두장이 집에서 잠을 자려면 부정한 무두장이의 침대에서 부정한 무두장이의 이불을 덮어야 하고부정한 무두장이가 사용한 수건을 사용하여 얼굴을 닦아야 하며부정한 무두장이가 사용한 식사 도구로 부정한 무두장이가 만들어 준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부정한 무두장이가 사용한 변소에서 용변을 보아야 합니다이런 일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첩경이었기에정상인으로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략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짐승의 시체를 다루는 무두장이를 예외 없이 부정한 존재로 여겼습니다무두장이와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그 무두장이가 사는 곳은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무두장이의 손에 닿기만 하면 부정을 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그러나 그처럼 무두장이를 부정한 존재로 간주하고 경원시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무두장이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죽 제품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벨트신발가방 등 가죽 제품은 그들의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필수품목이었습니다이렇게 유대인들이 무두장이를 부정한 존재라고 단정하며 경원시하면서도무두장이에 의해 만들어진 가죽 제품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이율배반이요가공한 이중성입니까이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이재철사도행전 속으로 4홍성사, 507-508)

제가 이 글을 만난 지가 2001년이니까 족히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재철 목사를 영적 멘토로 삼고 달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선배의 진솔성목회자로서 갖고 있는 올곧음그리고 보수적 관점에 서 있었지만결코 경솔하지 않은 지성적 영성 때문에 이 목사님을 존경하며 그의 목양 철학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분이 쓴 책은 단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섭렵했습니다.

그분이 쓴 글과 행한 설교 원고에서 제 목양의 1/2을 벤치마킹할 정도로 이재철 목사의 사역을 거울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목사께서 쓰고 말했던 일체 글감 중에 사도행전 9장이라는 오늘 본문을 강해할 때 피력했던 앞의 글은 적어도 제게 가장 강력했던 은혜와 교훈을 주었던 최고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었다고 말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고 기록한 누가의 글 보고는 무시무시한 영성을 요구하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전하시는 서늘한 비수(匕首)였습니다.

시대의 이율배반성을 여지없이 타격한 메시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사순절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까?

 

※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유리된 말과 삶의 간극을 좁히는 절기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체가 말과 삶이 하나이셨던 분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나의 주군은 이렇게 사셨건만 그분을 따른다는 우리는 말과 삶이 이원화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말 따로삶 따로 살고 있습니다.

세속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윤리적도덕적 가치에 비해 상상할 수 없는 막 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삶이 유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미친 듯이 공격합니다.

벌 떼처럼 몰려들어 사생결단식을 싸우려 합니다.

그럴 때우리는 그래도 너희보단 낫다고 에두르며 자위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가치가 세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와 비교 평가되는 수준이라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우리 교회 독서반에서 2/4분기에 나눌 텍스트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아베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수기인 단순한 기쁨입니다.

책 안에 이런 경험담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한 부인과 세 아이와 할아버지 한 분그리고 두 명의 남편들이 먼저 거주하던 빈집에서 쫓겨나 내게로 오는 것을 보았다나는 유스호스텔로 개조한 임시 장소에 그들을 머물게 했다내가 만든 노숙인들의 숙소는 이미 독일인프랑스인영국인들로 만원이었기 때문이다그 가족에게 내어줄 자리와 공간이 없었다달리 도리가 없기에 나는 예배실의 예수님상을 들어내 다락 한쪽으로 치우고그곳에 그들이 들어갈 그 기이한 처소를 만들어 거처를 마련했다.” (아베 피에르단순한 기쁨마음산책, 35)

처음 이 글을 만났을 때 벼락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개신교적인 표현으로 글감을 바꾸겠습니다.

노숙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교회 강대상을 치워 예수님과 연관된 일체 종교적인 것들은 창고에 잠시 옮겨두고 사람들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왜 아베 피에르가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게 하는 감동의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셨던 말씀을 삶으로 실천했던 피에르 신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5:35-4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순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리된 삶과 말의 간극을 좁히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기도문의 한 소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10절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읽다 보니 섬뜩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하늘의 뜻을 이 땅에도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가교입니다.

이런 막중한 미션을 부여받았는데 우리들이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김기석 목사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디에도 계신다.” (김기석오래된 새 길포이에마. 91)

사랑하는 제천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내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유리되지 않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간극을 좁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어느 곳에서도 계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