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3) 본문: 열왕기하 19:14-19 서론) 수 해 전, 낯선 지체 가정이 주일 낮 예배에 얼굴을 비쳤습니다. 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예배에 또 그 가정이 참석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또렷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몇 주 예배를 지속해서 참석한 지체의 가정을 목양실로 초청했습니다.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지체 가정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체가 말했습니다. “먼저 섬기던 공동체에서 나름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한 주, 두 주 그렇게 몇 주가 흘렀는데 주일만 되면 어느 교회를 가야 하는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더불어 날이 가도 달이 가면서 신앙이 어그러지는 이런저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파트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인 첫 번째로 보인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자고 나왔습니다. 그 교회가 세인교회였습니다. 첫 주 예배를 드렸는데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등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금 그 지체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선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수 해 전, 또 낯선 지체가 수요일 예배 시간에 보였습니다. 들어와 앉아 예배를 드리는 그 지체를 보니 나름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나 싶었습니다. 교회 탐방을 온 지체들은 통상적으로 찾아온 교회가 매우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 지체가 나온 예배가 수요일 예배였기에 늦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목양실로 초청하여 차 한 잔을 대접하며 교제했습니다. 지체가 말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섬기던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나온 뒤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세인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조명해 주신 교회라는 확신이 들어 먼저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목사님의 설교를 나름 샅샅이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영적인 기대감이 생겼고, 직접 세인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결심했는데 주일에 나가면 신천지 집단이 극성인 때라 혹시 나를 신천지 파수꾼으로 생각할까 두려워서 대단히 떨리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보다는 사람이 조금은 적은 수요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이후, 지체는 세인 교회 동역자가 되어 지금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도로 살면서 섬기는 교회가 없는 절망감과 아픔입니다. 앞에 언급한 두 지체가 공히 제게 고백한 내용은 섬기는 교회가 없었을 때 임했던 고통이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그리 낯설지 않은 신명기 역사서가 텍스트이지만 본문을 통해 조망한 그 의미의 해석은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기에 교우들은 오늘 말씀 해석에 집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전 722년에 걸쳐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인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함락되어 지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가 남 왕국의 연표로 보면 남 유다의 제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치세 7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아무리 북 왕국이 영적으로 패역했다고 하더라도 선민 공동체이기에 결코 무너지거나 망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은 남 왕국 유다에게도 적지않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남 유다의 위상은 군사력이나 국방력 차원에서 보면 북 왕국에 비해 훨씬 떨어지거나 아니면 도찐개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전 701년에 약소국가인 남 유다를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 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합니다. 산헤립은 질풍노도의 속도로 유다 성읍 46개를 점령하였고, 이 성읍과 연관된 주변 작은 성읍들을 유린했습니다. 남아 있는 유다의 성읍은 예루살렘만 남게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도 백척간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를 다스리던 히스기야는 도저히 군사적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비참하지만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군신의 예를 다하는 신하 국가가 될 터이니 군사를 물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산헤립이 대가로 유다의 히스기야에게 요구한 물질은 은 300달란트(23,700kg), 금 30달란트(2,370kg)이라는 막대한 물질이었습니다. (왕하 18:14절)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전을 만들 때 성전에 입혔던 금들을 다 다시 뜯어내는 수모를 감당하면서 상응하는 물질을 내주었지만 산헤립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군대 장관인 랍사게를 보내 유다를 칩니다. 결국 유다는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랍사게가 히스기야의 통치 하에 있는 유다를 치기 위해 유다를 모욕하는 장면은 수모 또 수모였습니다. 랍사게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좌절을 느끼게 하는 선전전을 합니다. 그것도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의 말로 공격합니다. 심리적인 공격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⓵ 유다의 군사들은 말을 주어도 탈 수 있는 군사들이 없을 정도로 오합지졸이다. ⓶ 유다의 통치자인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이집트가 유다를 돕지 못한다. 이미 그들은 우리 앗수르에게 패하여 자기 땅으로 퇴각했다. ⓷ 너희들이 믿는 너희들의 신인 여호와께서 우리 앗수르를 보냈다. 항복하면 일부라도 살려주기 위한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 ⓸ 너희들의 왕인 히스기야가 너희들을 보호하고 도울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히스기야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왕이다. ⓹ 히스기야가 전한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가 유다를 도울 것이라는 착각은 아예 버려라. 여호와가 너희들은 치기 위해 우리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략 5가지의 공격으로 산헤립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유다가 이길 것이라는 조금의 여백도 남기지 않고 산헤립은 그렇게 예루살렘과 히스기야를 압박합니다.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을 직감한 히스기야는 늦었지만 예언자 이사야에게 SOS 칩니다. 히스기야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사야 예언자는 열왕기하 19:1-7절에서 예언자가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전문을 나누어 보십시다.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보낸 전령인 엘리야김, 셉나, 그리고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신탁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 신탁을 히스기야 왕에게 전하라고 하명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다. ⓑ 왕은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해 엎드려라. ⓒ 앗수르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앗수르 진영을 간섭하여 쳐서 그들을 자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유다 예루살렘은 건재할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랍사게는 최후통첩을 담은 항복 문서를 편지로 작성하여 부하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항복 문서를 받은 히스기야는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받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신탁을 받았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 항복 문서를 들고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히스기야가 보인 반응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읽은 본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을 보십시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신에게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서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참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위엄으로 그룹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은 분이십니다. 하나님, 귀를 열어 들으시고 눈을 떠서 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뻔뻔스레 모욕하는 산헤립이 보낸 이 편지를 보십시오. 하나님, 과연 그의 말대로 앗시리아 왕들은 여러 땅과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나무와 돌을 가지고 손으로 만든 그곳 신들로 신도 아닌 것들로, 큰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하나님, 이제 건방진 앗시리아의 무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만이 하나님 오직 한분 하나님이심을 세상 모든 나라로 알게 하십시오.” 저는 이 본문에서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우리 세인교회 교우들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었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를 위해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그는 간절히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담임목사의 언어로 바꿉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교만한 존재인 앗수르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며 모욕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이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수모를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잘난 척하는 저들의 교만함과 건방짐을 일거에 날려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해 주십시오.”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힘을 얻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드린 이 기도는 매우 통쾌합니다. 하지만 오늘 종을 벅차오르게 하는 감동의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국운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 앞에 있었던 히스기야에게는 하나님께 엎드릴 성전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수모를 주고 있는 랍사게가 보내 항복 문서를 펼쳐놓고 절규하며 위기를 주님께 내어놓을 수 있었던 영적인 장소인 예루살렘의 성전이 히스기야에게는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장소는 성경적 내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고 올라갔던 모리아산입니다. 다윗이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라는 악수를 두자 하나님이 70,000명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재앙을 멈추십시다. 그 재앙을 주던 하나님의 천사에게 재앙을 멈추라고 명령하신 장소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다윗은 자신의 교만함을 회개하고 단을 쌓은 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던 지금은 성전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여기에 솔로몬 성전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히스기야는 항복 문서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앗수르의 공격에 대해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넘깁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열방에 보여주십시오.” 히스기야가 이 기도를 드린 뒤에 산헤립 군대 진영에 하나님이 직접 침투하셔서 185,000명의 군사를 초토화시키셨고, 결국 앗수르 본국으로 퇴각한 산헤립은 무력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쓰러져 목숨을 잃게 하셨음을 이어지는 열왕기하 19:32-37절이 보고합니다. 재강조하지만 오늘 담임목사가 전하려는 설교의 포인트는 유다를 깔보고, 유다의 하나님을 능멸한 산헤립의 멸망에 방점을 두려고 했음이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를 통해 집중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히스기야에게는 절대적인 위기를 아뢸 수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오늘 설교의 교훈을 2024년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의 언어로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내 영혼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다잡이 해주고 섬길 수 있는 내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사순절 두 주를 통해 사순절 피정을 통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었습니다. Ⓐ 선포되었고 공급된 은혜를 망각하라는 집요한 랜덤의 시기에 도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를 복기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 내 뜻이 옳다는 내 식의 신앙을 하나님의 뜻 아래에 내려놓고 굴복하는 삶을 살아야 시기가 사순절임을 밝혔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세 번째로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섬길 수 있는 세인 교회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결코 감사를 잊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섬길 수 있는 교회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24년부터 세인 교회의 지경이 넒어졌습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의 지경 중에 가장 멀리 있던 지체는 원주였습니다. 하지만 2024년부터는 경북 예천도 우리 교회가 섬기는 지경이 되었고, 수원 그리고 심지어 부산까지 지경이 확장되었습니다. 원주에서, 예천에서, 수원에서, 부산에서 세인 교회 공동체의 멤버십을 갖고 사역하는 지체들이 동역자로 서주어 종은 감사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영적인 부담감이 더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외곽지역에 있는 지체들에게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선포하는 말씀을 기초로 담대히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섬길 수 있는 교회가 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천으로 이사한 후에 여러 차례 교회를 다니는 수고를 한 끝에 세인교회 동역자로 서 있는 지체가 있습니다. 어떻게 또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만난 교회가 세인 교회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마치 히스기야가 당한 위기와 절박함이 있었지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기도의 교두보인 솔로몬 성전을 그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것처럼, 바로 당신에게 세인 교회는 하나님이 그렇게 예비하신 감사의 처소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다니던 교회를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게 되었을 때, 기도라도 해야겠다고 새벽에 나왔다가 눈에 들어온 교회가 세인 교회였기에 새벽예배를 참석한 이후 동역자가 된 지체도 있습니다. 우연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지체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해 보이게 한 교회가 세인 교회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감사의 조건입니까?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쓰려면 수많은 페이지가 제게 필요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기억하고 명심하십시다.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고 호흡이 있는 동안 내 천로역정의 행군을 걷게 해준 세인 교회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고의 감사 조건임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내 옆에 있음에 감사하십시다. 이것을 다시 한번 복기하는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