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8일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1) 본문: 민수기 21:4-8 서론) 지난 주, 2월 14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남기신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를 결단하며 펼쳐질 40일 동안 조금은 더 근신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기막힌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전형적인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준 기억할 만한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1998학번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 입학생이자, 그로부터 8년 뒤인 2006년에 대학을 졸업한 동문 이효리씨가 모교인 국민대학교 전기 졸업식에 연설자로 초청받아 후배들을 위해 연설한 내용이 보도된 것입니다. 그날 이효리씨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녀가 전한 연설의 골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 조금만 부연한다면 이런 류였습니다. “나는 졸업하는데 8년이나 걸린 사람이다. 그러니 후배들에게 연설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왕 섰으니까 말한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말도, 제일 친한 친구의 말도 심지어 훌륭한 성인들이 남긴 말도 우리들은 안 듣는데 뭐 좀 유명하다고 와서 떠드는 이효리의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한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마라. 그냥 '인생 독고다이'다 하시면서 쭉 가시라. 어떠한 조언을 해주기 보다는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라. 이래라 저래라 위하는 척하면서 이용하려는 이들의 잡다한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라.” (유트브 영상에서 녹취후 발췌) 이렇게 말한 그녀는 연설을 중단하고 학사모를 벗은 뒤 모교에 왔으니까 이효리하면 생각 나는 노래 chitty chitty bang bang 이나 부르고 내려가겠다고 말한 뒤, 졸업생은 물론 하객들 심지어 단상에 있는 교수들까지 열광시키는 한 바탕의 공연을 벌이고 연설을 마쳤습니다. 그녀가 부른 ‘치티 치티 뱅뱅’의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너의 말이 그냥 나는 웃긴다 그냥 그냥 그 누구도 내게 간섭마 다 똑같은 말도 하지마 여긴 나만의 곳 Its my world 더 이상 이젠 나를 찾지마 상당수 많은 여론들은 이효리씨의 대학 연설을 높이 평가하며 파격이었다고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효리씨의 연설을 영상으로 들으면서 갑자기 지난 주간 거친 초고를 완성한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의 마지막 부분이 다시 공명되었습니다. 사사기 21: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베냐민 땅에 속해 있는 기브아에 들렸던 레위 사람은 남색하는 자들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하자, 자신의 첩을 강제로 기브아의 깡패들에게 넘겨 주어 윤간 당하게 합니다. 그렇게 윤간당한 첩은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인간같지도 않은 레위 사람은 죽은 자신의 첩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의 시신을 12토막내 이스라엘 각 지파의 두령들에게 보냅니다. 엽기적인 일을 만난 이스라엘 12지파는 미스바 총회를 열고 이 참담한 일을 벌인 원인자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깡패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즉각 총회는 그 불량자들을 척결할 테니 내 놓으라고 베냐민 지파를 압박했지만, 불량자들을 보호한다는 깡패 의리를 내세워 총회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결국 가나안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나안 거민들을 내쫓아야 하는 본(本)은 뒤로 하고 동족 상잔의 비극인 내전을 맛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같은 지파 공동체에 속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 말(末)에 봉착합니다. 우여곡절 끝의 내전 끝에 총 인구 26,700명이었던 베냐민 지파는 멸절당하고 600명의 남자들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내전으로 인해 한 지파가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전쟁이 끝난 뒤에 직시했던 11지파의 두령들이 모여 자기들이 죽인 지파를 다시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였는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600명이 남은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에게 짝을 맺어 주기로 한 것인데, 11지파의 두령들이 결의한 내용 중에 자기 지파의 딸들은 결코 베냐민 남자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 어떻게 하면 베냐민 지파를 다시 살릴 것인가 논의한 끝에 내전에 같은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은 부족이 길르앗 야베스라는 것을 보고받은 이스라엘 총회는 12,000명의 군사를 길르앗 야베스로 보내 주민과 부녀자들을 무차별로 살해합니다. 단 이런 집단 학살의 죄를 자행하면서도 길르앗 야베스 출신의 여자들 중에 남자와 성관계를 맺어본 일이 없는 처녀들 400명을 살려둡니다. 그리고 그 400명의 처녀들을 베냐민 지파의 살아남은 남자 400명에게 맞춰줍니다. 문제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00명의 처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두 번째의 막장 드라마를 쓰는데 실로라는 지역에서 야훼의 절기가 매년 열리는데 그 축제에 나온 실로의 처녀들 중에 200명을 납치하는 폭력을 감행한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요셉의 반지파인 므낫세 지파에 속한 땅이었고, 실로도 요셉의 또 다른 반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이었지만, 이스라엘에서 볼 때 이방의 땅이라고 자의적으로 정의하여 합리화시키며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합니다. 결국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에 가서 거행된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러 나온 처녀들 중에 200명을 납치하라고 총회는 동의했고 구색을 맞춘 이스라엘 총회는 이렇게 죄악을 허용함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명맥을 이어주는 최악의 선택을 합니다. 이런 무자비하며, 잔인했고,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범죄를 자행했던 이스라엘 총회(미스바 총회라고 말하기도 함)의 집단적, 공동체적인 범죄를 고발한 사사기 기자는 사사기의 총 결론을 이렇게 멪고 있습니다. 사사기 21:24-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인 전성민 박사는 사사 시대의 마무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재한 가운데 유괴당하고, 찢기고, 죽임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악은 흐른다. 그들은 그 악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시대의 어둠이 너무 깊다. 이것은 사사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우리의 마음은 더욱 무겁다. 지금 우리는 사사 시대의 어둠이 낯설지 않다. 연달아 들려오는 삶의 무게에 눌려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사기 마지막의 여인들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악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쏟아부어지는 세상의 희망는 어디에 있을까? 희망의 좌표는 무엇일까?” (전성민,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시대-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321쪽) 제 두 번째 사사기 책 초고에 이렇게 저 역시 갈무리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죄악의 극치를 보여준 주인공들이었다. 내 것은 안 되고 네 것으로 하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주인공들이었다. 자기 지파의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지파의 한 부족을 멸절시키는 것을 당연시 했다. 자기 지파의 딸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지파의 딸들을 강간하고 납치하는 일에 눈감았고 공범으로 도왔다. 심각한 것은 그들은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사 시대보다 더한 시대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다. 어떻게 해야 사사 시대보다 더한 극단의 신사사시대인 오늘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 믿음을 갖고 있는 자는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이다. 무엇이든지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은 재앙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초고에서) 본론) 오늘을 정의할 때, 상식적이며 건강한 신학을 기초로 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구동성 신사사시대라고 정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참담한 시대의 분위기에 살고 있는 세속적 가치에 함몰된 자들은 여전히 이렇게 부축입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참 괜찮은 세상이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 또한 참 괜찮은 일일 테니 독고다이로 밀고 나가라고 선동합니다. 네가 하는 일이 정답이고 진리니 누구의 말도 믿지 말고 밀고 나가라고 거세게 선언합니다. 치키치키 뱅뱅을 노래하면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어김없이 2024년에도 사순절은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익숙하게 들었고 알고 있었던 오늘 본문을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텍스트로 정한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에 나온 후,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을 그리워하자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는 주셨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렇게 감격해 했습니다. 출애굽기 16:31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그러나 만나가 식상할 때 즈음, 다시 불만을 제기한 이스라엘의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민수기 11:4-6절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 말고 다른 고기,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들을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요구에 참담하셨지만 다베랴에서는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그렇게 근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가나안이 목전에 있는 어느 날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1권에 나오는 그림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그림 소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친족의 땅인 에돔을 경유하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수월해짐을 알고 에돔에게 길을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에돔왕에게 일언지하로 거절당합니다. 친족과의 전쟁을 할 수 없었고, 하나님도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우회로를 택하여 네겝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네겝은 아랏이 통치하는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랏땅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아랏왕은 아다람길에서 이스라엘 군사 몇 사람을 치고 생포하며 방해합니다. 이스라엘은 급한 나머지 하나님께 아랏을 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아랏을 점령하는 소위 말하는 호르마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의 기세를 발판 삼아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행하여 진군하면 되는데 못된 버릇이 도집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호르마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호르 산을 출발하여 에돔을 우회하는 길을 택합니다. 이 길은 아마도 엘랏을 거치는 행군이었을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직접 통과하면 훨씬 빠른 가나안 진입이었겠지만 친족인 암몬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에시온게벨로 내려왔다가 에돔을 우회하여 행군합니다.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고된 행군에 지친 이스라엘은 다시 또 하나님꽈 모세를 동시에 원망합니다. 마음이 상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언급하며 도발합니다. 이어지는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그 동안에는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대상은 모세와 아론에 국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발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하나님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광야로 이끌어내서 우리를 죽게한다는 성토였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으며, 심지어 하찮은 음식(만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만을 접하신 뒤에 대노하셨습니다. 불평하는 자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윽고 다시 겁에 질린 이스라엘은 상투적이든 습관적이든 다시 돌이키고 모세에게 중보를 요청하자 모세는 중보했고, 결국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놓게 하신 뒤,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시 살게 하셨다고 본문은 적시합니다. (6-9절) 이상의 본문 정황입니다. 사순절 첫번째 주를 맞이한 우리 세인 공동체 지체들에게 본문은 어떤 공명을 들려줍니까?
※ 공급해 준 은혜를 잊으라고 압박하는 시대가 오늘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2024년 사순절 절기 동안, 우리 교우들과 제가 새겨야 하는 영적 지침을 복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 공급된 은혜, 이미 경험했던 은혜, 또 앞으로 임할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되살리는 것이 사순절을 보내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1-2절을 만나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2월 14일 아침에 묵상한 성서일과입니다. 그날 저는 이 성서를 읽고 이렇게 묵상 노트에 글을 남겼습니다. “은혜는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부터 임한다.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은혜 중에 헛되게 받을 만한 은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은혜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인 나의 소회다. 하나님의 은혜는 버릴 것이 없다. 부스러기라도 버릴 것이 없다.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그 의미는 전적으로 은혜로운 삶이다. 민감한 사순절로 내 삶을 적용해 보자.” 은혜 중에 버릴만한 은혜가 임한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 그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까? 꿀 섞은 과자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꿀 섞은 과자보다 마늘이, 부추가, 오이가, 고기가 더 그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의 음식은 그리워하면서도 그곳에서 당했던 짐승 같았던 노예 생활은 잊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무뎌진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은 것, 귀찮은 것, 허접한 것으로 매도하는 무감각으로 발전되는 재앙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하게 베냐민의 일반 주민들을 학살하고, 죄없는 길르앗 야베스의 사람들을 도륙하고, 실로와 야베스의 처녀들을 납치하는 잔인한 죄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그 무감각의 시대인 사사시대가 은혜를 망각한 시대였던 것처럼 오늘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자들 역시 도진개진입니다. 2024년의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경험했고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금 새기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도서출판 느린 걸음에서 『눈물 꽃 소년』을 보내주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어린 시절을 경험을 담은 자전적 수필입니다. 2월 22일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는 책을 제게 보내준 이유는 이전에 제가 쓴 박노해 시인의 서평처럼 리뷰를 부탁하면서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려는 계획 때문에 보내주었습니다. 지난 주간,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따뜻한 글이라 북 리뷰도 잘 써볼 요량입니다.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박노해, 『눈물 꽃 소년』, 느린 걸음, 2024, 14-17쪽) 하루는 엄니가 햇살 좋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수확한 녹두랑 팦이랑 수수를 부어 당글게로 고르게 펼쳐놓고 내게 일감을 맡기셨다. “이 장대 들고 새들 좀 봐라이. 이따금 당글게로 잘 뒤집어 잘 말리면서잉” 그러고는 바닷가 물둥지에 김장 배추랑 무를 절이러 나가셨다. 마루에 앉아 숙제를 마친 나는 색색으로 빛나는 알곡들을 뽀닷하게 바라보는데, 웬걸, 하나 둘씩 새들이 날아오더니 요것들이 짹짹짹 호르르 호르르 소문을 냄시롱 참새, 동박새, 산비둘기, 까치 떼까지 날아들어 가을 잔치판을 벌이는 게 아닌가. 키에 쬐만한 나는 긴 대나무 장대를 들고 휘청이며 새들을 쫓았다. 처음에는 멀리도 날아가더니 차츰 요령을 터득한 새들이 이쪽으로 쫓으면 휘르르 저쪽으로, 달려가 쫓으면 호르르 이쪽으로 너른 마당을 오가며 잘도 쪼아 먹는 거였다. ‘이런 새대가리’라는 말은 새를 모르고 하는 말씀, 새들은 참으로 영리했다. “나가 시퍼 보이냐! 나랑 해봐 불자 이거제잉!” 더 씨게 장대를 휘둘러 봐도 새들은 휘뚜르마뚜르 마당가 감나무로, 대추나무랑, 유자나무 끝으로, 대나무 사이로 숨었다가 어느 새 휘르르 날아와 또 쪼아 먹었다. 당글게로 알곡을 뒤집으랴, 훠이 훠어이 소리치랴, 장대 들고 뛰어 다니랴, 요기조기 새똥 치우랴, 온 마당을 달리다 보니 팔다리는 아프고 배는 고파 힘도 딸리고 그래도 새를 열심히 쫓고 있는데, 노을녘에야 절인 배추랑 무를 이고 엄니가 돌아오셨다. “알곡들 잘도 말렸다. 근디 놀멘 하제이, 그리도 열심히 쫓아다닌다냐아. 새들도 좀 묵어야제.” 나는 그 소리에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며 은근이 부아가 나서 암 말도 안 했다. 저녁 밥상에도 암 말도 안 했다. “낙지가 맛이 들었다. 금풍생이 구이 좀 먹어봐라, 요것도 좀 먹어봐라.” 엄니는 토라져 있는 내 밥숟가락에 찬을 얹어줘도 암 말도 안 해부렀다. 삼종기도를 마친 엄니가 벌써 이부자리에 누운 내 머리맡에 앉아 나직이 말씀하셨다. “평아, 오늘 애썼는데 서운했냐아. 근디 말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지야.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거란다. 갯벌에 꼬막도, 저수지에 새뱅이도 씨마를까 남겨두는 거제이. 머루도, 개암도, 산짐승들 먹게 남겨두는 거고. 동네 잔치 음식도 길손들 먹고, 동냥치도 먹게 남겨두는 것이제. 아깝고 좋은 것일수록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주는 거제. 잘 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게시니께.” 내 등을 다독다독 쓸어주는 엄니의 손길이 다숩기만 해서, 분하고 서운한 마음에 토라졌던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이불을 당겨쓴 채로 눈물을 삼켰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글을 읽다가 박노해라는 시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과정 중에 시인의 어머니가 끼친 형용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가 있음을 실감나게 체휼했습니다. 받은 은혜를 헛되이 여기지 않는 자는 그 은혜를 나누어주는 자가 됩니다. 반면,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은혜들을 잊고 사는 자는 무감각의 무저갱이로 빠져든 최악의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세인 교우들은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사순절 삼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있는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있는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 피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있는곳 내 주의 강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