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신년감사주일: 느헤미야 43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3:15-31 제목: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2) 서론) ‘싱어게인 3’이라는 타이틀로 경연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싱어게인 1’ 프로그램에서 백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했던 이재철 목사의 아들인 이승윤씨가 우승을 해서 익숙해진 탓인지를 모르겠지만, 출연한 가수들의 면면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도 제가 주목하는 출연자는 홍이삭이라는 가수입니다. 지난 주간 상위 7명의 가수가 경연 후에 선정되었는데 제 눈에는 손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선교사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홍이삭 가수가 크게 보였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사역하는 부모를 둔 선교사 키즈라는 왠지 모를 정서적 공감이 있기에 나도 모르게 그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하나님의 세계’라는 곡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 주님의 세계는 정말로 내가 나같고 솔직할 수 있는 곳 조금이라도 내 의라 말할 수 없는 이 곳,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세상은 항상 말하네 그길이 아니라고 곱디 고운 길이 있는데 왜 힘들게 사냐고 단순한 선택조차 내겐 버겁기만 한 곳, 그래도 나는 주님만 따르리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더 깊도다 더 깊도다 나는 계속 걸어 갑니다 수 없이 넘어져도 사람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해도 내가 가는 길이 주가 가르쳐준 길이니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그의 찬양을 듣다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항상 말하네 그길이 아니라고 곱디 고운 길이 있는데 왜 힘들게 사냐고 단순한 선택조차 내겐 버겁기만 한곳 그래도 나는 주님만 따르리“ 그렇습니다. ”수 없이 넘어져도 사람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해도 내가 가는 길이 주가 가르쳐준 길이니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 홍이삭 형제가 고백한 그대로 세상이 말하는 길이 아니라 주가 가르쳐 준 길을 걷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려면 방심하면 안 됩니다. 빈틈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느헤미야의 부재 기간 동안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원인을 알아보았습니다. 세속주의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려는 욕망이 제일 원인이었고, 구태로 회귀하는 삶에 대해 무감각하게 방심한 것도 또 다른 이유임을 살폈습니다. 지난주일에 보았던 이런 두 가지의 이유 뿐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으로 무너져 내린 세 번째, 네 번째의 원인들을 고발하고, 느헤미야가 이런 원인을 일소한 뒤에, 다시 개혁의 고삐를 쥐고 달려가는 통쾌한 메시지를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느헤미야 역사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 그 세 번째와 네 번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 안식일의 파괴에 대한 단호한 대처였습니다. 본문 15절-16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아 정체가 불투명한 어떤 사람이 유다 지경 안으로 들어와서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고,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짐들을 펼쳐놓고 예루살렘에서 매매하는 것을 느헤미야가 본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두로 사람은 예루살렘 성 안에 살면서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그도 안식일에 매매를 하는 것까지 느헤미야는 포착합니다. 15절에 기록된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요? 윌리암슨 교수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 밖에 살고 있던 유대인인 것으로 여겨진다.” (H,G.M, 윌리암슨, 『에스라, 느헤미야』, 394쪽) 윌리암슨의 말대로라면 이 사람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모를 리 없습니다. 결국 이 사람이 예루살렘 밖에 거주하면서 안식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물건을 매매한 것은 분명히 율법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일탈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두로 사람의 상업적인 행위는 당시 두로가 상업적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이방인이었던 그가 안식일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리 없었기에 너무 자연스럽게 안식일에 상업적인 일을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부재 중에 무너져 내린 안식일 정신에 대해 분노한 느헤미야는 즉각적인 개혁 모드에 들어갑니다. 18-22절에 이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반응과 대처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느헤미야는 안식일 전에 성문을 자기가 직접 닫을 것이며, 성문을 봉쇄하면서까지 안식을 지키도록 하려는 개혁의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안식일에 물건을 팔지는 않지만 일을 하거나, 혹은 성 밖에서 밤을 보내면서 다음날 시장에서 좋은 자를 선점하려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절) 하나님은 단순한 규정에 따른 순종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비록 재정적인 불이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21절)고 엄히 경고한다. 후속책으로 느헤미야는 레위 사람들을 안식일에 성문을 지키는 자로 임명한다.(22절)” (소형근, 『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주석- 느헤미야』, 216쪽) 소 교수의 주석에 따르면 느헤미야는 조금의 빈틈이나 여백을 주지 않는 단호함으로 안식일 파괴자와 파괴 행위에 결연한 의지를 갖고 분연히 맞섰음을 분명히 보고하고 있습니다. 4. 이스라엘 깊숙이 스며든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맞서 이방인들과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3-24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이 구절은 특히 느헤미야를 지금 읽고 있는 우리 독자들 세인 교회 교우들이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입니다. 느헤미야 역사서 직전 책인 에스라 9-10장을 읽다보면 제2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던 에스라가 귀환해서 보니 이미 1차 포로 귀환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방인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는 일이 자행되었음을 알고 개혁을 단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차례 언급했듯이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시기가 주전 458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연대가 주전 445년입니다. 그렇다면 약 13년이라는 시간적인 갭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느헤미야 개혁 운동의 클라이맥스인 이방인들과의 결혼 금지 개혁은 이미 13년 전에 한 차례 진행된 이슈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과 1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유다 예루살렘 신앙공동체 안에는 덕지덕지 끈질기게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범죄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다 지도계층에 있었던 지도자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며 여자들을 며느리로 들이는 행태였습니다. 이 죄악이 버젓이 자행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23-24절은 기가막힌 일이었습니다.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들을 유다 남자들이 아내로 들이자 그 결과, 자녀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머니 나라의 말은 하는데 아버지 나라의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아스돗, 암몬, 모압은 느헤미야 전 역사에서 유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피해를 입힌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나라의 대명사들인데, 지금 유다의 자녀들이 그 부정적인 나라들의 언어를 쓰면서도 정작 조국인 히브리어를 쓰지 못하는 넌센스 같은 불행이 자초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막힌 일을 목도한 느헤미야의 반응은 오늘 21세기의 정서적 감각으로 보면 대단히 불쾌하게 보일 정도로 냉담하고 싸늘한 반응이었습니다. 이어지는 25절을 봅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책망했고, 저주하기도 했으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는 린치도 가했습니다. 심지어 최고의 모욕을 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머리털까지 뽑았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대입한다면 이런 독재자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니 말이 된단 말인가! 라고 대단히 흥분하는 교우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은 조금만 뒤로 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느헤미야는 마치 독재자를 방불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자행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을까요? 당시를 관통하는 역사적 팩트를 살피면 그 답이 나옵니다. 26-27절은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드는 보고입니다.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대단히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와 여타 세미나를 통해 드렸던 강의안에서 저는 에스라-느헤미야기가 신명기 역사서의 분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역대기 역사서로 분류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바 있습니다. 족보를 통한 이스라엘 역사와 정체성 찾기라는 큰 목적 하에서 기록된 역대기 역사서 저자들은 선조 왕들의 잘못된 점과 오류들을 크게 부각하지 않습니다. 고의적으로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의 기사는 역대기에 없습니다. 우상 숭배로 인해 이방 종교를 들여와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솔로몬의 범죄도 역대기 역사서 안에서는 스리슬쩍 넘어갑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고 선왕들의 잘못을 대단히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역사서 저자도 이 점에 있었서는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니 본문 26-27절은 파격적 발언이자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추앙하도록 계획된 솔로몬이라는 선왕을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허용했던 이방 여인들의 수용,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에 들어와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이방종교에 대한 우상숭배의 근원이 혼합적인 결혼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국가적, 종교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느헤미야였기에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및 통혼을 강력하게 일소하는 개혁을 진행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픈 마음을 갖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28-31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우리는 지난주일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에 대해 살폈습니다. 느헤미야는 물론 성벽 재건에 대해 강력한 반대를 자행했던 인물인 도비야에게 성전 한 곳에 큰 방을 내어주었던 인물, 헌데 오늘 본문에는 그 인물 엘리아십의 손자의 아들인 요야다가 또 다른 성벽 재건의 방해자였던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었다고 고발합니다. 제사장 그룹의 선두에 있었던 대제사장 가족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에 선두에 서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자행한 자가 평범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이었습니다. 최고 종교지도자의 탈선이었기에 정치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상대적으로 경우에 따라 운신의 폭이 적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공권력을 갖고 하나님 신앙을 좀 먹고 있는 엘리아십을 공동체에서 쫒아냅니다. 말 그대로 출교한 것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혁명과도 같은 개혁을 과감히 진행한 것입니다. 영적인 메스를 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이방 여인을 들인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수용했던 이방여인들을 척결하고 그들의 나라로 내 보내는 것으로 회개하고 돌이킴을 행한 자들에게 성전에 쓸 땔감을 드리게 하고, 첫 열매를 드리게 한 뒤에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합니다. 완전한 재헌신을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고, 잠시 바사로 돌아간 터에 처절하게 붕괴된 유다 신앙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다시 돌아와 바로 세우는 참 지난하고 힘든 여정의 사역을 감당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본인의 이 모든 사역을 글로 기록하면서 마지막 구절에서 의미심장한 기도를 드리고 역사서를 마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31절 2f) 이상으로 저는 2023년 1월 29일 주일에 시작한 느헤미야 강해를 거의 1년 만에 마감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강해를 마치면서 설교 제목을 다시 한 번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를 신년감사주일 아침에 피력하려고 합니다. 주지했다시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가 대단히 카리스마틱한 행위를 주저하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행위들을 했음을 살폈습니다. 21세기 감각으로 해석할 때는 느헤미야는 대단히 과격한 성격을 가진 독재자 기질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이요한 전도사가 연세대학교 본대학원 석사 학위 코스워크 중에 느헤미야 세미나를 수강했습니다. 아들의 담당교수는 대단히 젊은 구약학자이다보니, 이념이나 사상이 대단히 진보적인 성향의 지성인입니다. 한 학기가 끝나갈 즈음에 아들이 느헤미야를 한 학기 동안 수강한 피드백을 사석에서 내게 느헤미야의 정체성을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대단히 급진적이고 과격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에 코스모폴리터니즘과는 동떨어진 배타적인 정치인” 진보적인 학문의 기틀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공히 아주 자연스럽게 동의하는 느헤미야에 대한 인식입니다.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김기석 목사도 목회자이지만 이런 신학자들의 의견에 거의 동의하는 편으로 느헤미야를 해석합니다. 그는 사석에서 내게 이렇게 에스라, 느헤미야에 대해 평가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역사서를 설교하기가 대단히 불편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폐쇄성과 히브리 민족의 배타성을 너무 진하게 보여주는 불편한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신학은 해석학적인 것과 결별할 수 없는 태생적 관계가 있기에 진보적인 신학자나, 목회자가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해석학적인 관점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커멘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느헤미야를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는 과격한 폐쇄적 지도자로 인정하는 해석의 한 편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강덕 목사의 해석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싶습니다. 제가 해석한 느헤미야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입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귀환 이후 제 2 유대 성전 시기(에스라, 느헤미야, 마카비 그리고 힐렐로 이어지는 유대 종교의 과도기)에 다시 쓰러지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쓰신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하며 살아낸 그 시대에 합당했던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느헤미야의 영성을 인정하는 목회자입니다. 주전 445년 이후 예루살렘 성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견고히 새워갔던 시대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합니다. 어디에 그 근거를 두는가? 무서우리만큼 철처하게 치열했던 하나님 중심 신앙에 그 근거를 두고 싶습니다. 21세기적인 시대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로 접근할 때, 느헤미야는 비판받을 만한 것이 다분히 많은 정치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 신앙에 대한 영성을 지지합니다. 왜 지지합니까? 오늘 2024년 1월 7일 즉 2024년을 출발하는 새해 신년감사주일 아침 현장에 여전히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오직 하나님 중심적 신앙적 치열함을 갖고 있는 자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008년 봄에 직전 교회에서 사역을 내려놓고 서울에 있는 모 교회와 맞트레이드를 이야기 하는 중에 우리 교회 지체 한 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우리들을 버리고 서울로 가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천이라는 도시에 목사님이 계속 계시면 개인적으로는 많이 힘들고 아프고 앞 길도 순치 않으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한 가지 소망이 제게 있습니다. 제천이라는 도시는 지방에 있는 도시입니다. 주변에 믿는 자들 중에, 그리고 지인 중에 제천에 교회는 많지만, 갈 교회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목사님, 제천에 남으셔서 사람들이 가고 싶은 교회 하나 만들어주시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새벽에 절규하는 데 주군께서 오셔서 제게 말씀으로 조명하셨습니다. 그 때 받은 말씀이 사도행전 18:9-10절이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꼼짝없이 붙들렸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앞에 소개한 지체의 예언대로 정말 쉽지 않은 지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비아냥, 죽고 싶을 만큼의 기막힌 누명, 이단 교회의 괴수 등등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고통의 세월과 삶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준 은인은 제게는 느헤미야였습니다. 저는 흔들리지 않는 무섭도록 치열한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끝까지 이어갔던 느헤미야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신도 지도자였지만, 고난이 오면 도리어 더 강해지는 느헤미야의 영성을 그의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배웠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강덕목사를 제천세인교회를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가도록 지속해서 불 붙여준 성경안에 있는 믿음의 선배입니다. 제가 믿음의 선배인 느헤미야에게서 배운 최고의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섭도록 치열한 하나님 중심의 영성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를 마치면서 홍이삭 형제가 부른 ‘하나님의 세계’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것을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합니다. (홍이삭 형제의 ‘하나님의 세계’ 영상 시청) 사랑하는 세인교회 지체 여러분! 시대가 흑암으로 시계제로입니다. 한 가지를 권면합니다. 느헤미야처럼 무서우리만큼 치열한 하나님 중심의 영성에서 벗어나지 마십시다. 치열해야 합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내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다. “세상은 항상 말하네 그길이 아니라고 곱디 고운 길이 있는데 왜 힘들게 사냐고 단순한 선택조차 내겐 버겁기만 한 곳, 그래도 나는 주님만 따르리”라고 고백하며 2024년을 걸으십시다. “수없이 넘어져도 사람들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해도 내가 가는 길이 주가 가르쳐준 길이니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이곳은 바로 주님의 세계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향한 믿음의 뚝심을 갖고 힘차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맏겨라 슬플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일에 이르는 모든 산은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