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0일 금요일 성서 일과 묵상 하나님 만들기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5편, 출애굽기 32:15-35, 야고보서 1:9-16, 아가 2:1-7, 시편 45:1-2, 6-9 꽃물 (말씀 새기기)
출애굽기 32:22-23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마중물 (말씀 묵상) “자기의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폴 쉴링, 『무신론 시대의 하나님』, 현대 사상사, 16쪽) 유대인 출신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갈파한 이 문장은 신학대학교 학부 시절에 읽었던 최고의 촌철살인이었다. 이 문장은 신학교 시절, 목사로 사역할 때 어떻게 목양의 현장에서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적어도 필자에게는 알려준 내 인생의 한 마디였다. 출애굽기 32장은 부버의 일침대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혀 인간 스스로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주(主)이신 하나님을 변질시킨 가장 대표적인 성경 본문이 아닌가 싶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인 시내 산에 올라간 뒤 40일 동안 두문불출하자, 성질 급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아론에게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고지한다. 이윽고 그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 것을 종용하고 압박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세력에게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대중의 물리력에 굴복하여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여인들의 금귀고리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든다. 그렇게 금송아지가 만들어지자, 아론을 압박했던 무리들은 한발 더 나아가 만들어진 금송아지를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의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아론은 여호와로 지칭된 금 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제사를 마치고 난 무리들은 여호와의 절기에 먹고 마시며 뛰어놀았다고 출애굽기 32:6절은 보고한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 놀더라”(출애굽기 32:6 개역개정판) 6절을 신학적인 해석이 없이 그냥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독자들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이 사건 기사의 정황을 놓고 볼 때 금송아지의 형상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행위가 번제(올라)요, 화목제(제바-쉘라밈)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형상은 송아지의 형상이기는 했지만, 그 형상의 상징은 고대 근동의 이상한 종류의 잡신(gods)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신(god)이라는 분명한 인식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대노하고 시내 산에서 하산하게 한 모세를 통하여 두 돌 판으로 그 금송아지 형상을 깨뜨리게 하셨다. 후에 이 사건을 회상하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인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형상의 파괴는 혹독하리만큼 무자비했음을 알려준다.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신명기 9:21 개역개정판) 하나님이 너무 민감하셨던 것은 아닌가?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출애굽기 32장의 성서신학적 주석을 전제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4절에 기록된 ‘송아지’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겔’은 고대 근동에서 우회적으로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다. 동시에 ‘소’는 고대의 신(神)들이 밟는 받침대로 사용된 동물이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금송아지는 아주 하찮고, 보잘 것이 없어서 짓밟아도 되는 존재라는 고의적 폄훼가 이 단어 안에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뛰놀더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차헤크’ 라는 동사가 고대 근동의 종교적인 제의에서 성적인 난교와 잔치를 벌일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다시 말하면 허울 좋은 종교적인 쇼를 벌인 뒤에 시내 산 난장(亂場)판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그동안 하나님 때문에 억눌려 있었던 육체적인 쾌락을 마음껏 누리는 카니발을 열었다는 것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 그 지난(持難)했고, 이론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하여 시내 산까지 도착했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가 어떻게 이렇게 한 방에 변질될 수 있었던 걸까? 그 답을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간섭하지 말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머물러 주기를 압박한 것이 시내 산 사건이다. 우리들이 적당한 제사와 제물을 드릴 테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섭하거나 끼어들지 말라고 하나님에게 선전포고한 일 시내 산 난장 사건이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46쪽) 오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목사, 신자들에게서 너무 많이 느끼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안전한 하나님으로 남아 주기를 원하는 아픔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한복판에 들어오면 부담스러워한다. 불편해한다. 안전한 거리에서 나를 돌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손사래를 치는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비극이요, 참극이다. 뉴욕 리디머 교회를 이끌었던 팀 켈러의 경고가 크게 와 닿는다. “어떤 문화든 하나님을 몰아내다시피 하면, 사람은 그 빈 자리를 섹스와 돈과 정치가 채우게 마련이다.”(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 169쪽.) 무서운 통찰이다. 하나님은 선언했다. “나는 나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두레박 (질문) 나는 내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나는 나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만들지 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님만이 평강이기에 주님만 붙들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이 땅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