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사랑은 느림에 기대어2024-06-11 10:16
작성자 Level 10

 

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비아토르
ㆍ작성일 2022-04-22 11:24:17

 

김기석의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 (비아토르, 2022년 간)를 읽고


목회를 하는 현장에서 살기에 포장된 민감함에 스스로 자위하지만 아주 가끔은 아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너무 자주 무감각함이라는 비극에 노출되는 나를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그런데도 감각하지 못하는 목사인 ‘나’를 발견할 때다. 이럴 때마다 나를 매섭게 몰아치기 위해 서고에서 꺼내 읽는 한 문장이 있다.

“영적 표절의 대가는 자신의 정직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기 확대는 자기 배신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한국기독교 연구소, 2019, p,197.)

어제 개인적으로 섬기는 건강한 목회와 목사 만들기 리서치 모임인 DPA(Disciple Pastoral Academy)에서 한 세션을 맡아 사역했다. 강의의 제목은 ‘독서가 설교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사역의 시작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던진 화두로 말문을 열었다.

“질문하는 자는 항상 이긴다. 이제 패배를 무릅쓰고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18, 141.)

이 화두를 동역자들에게 던진 이유를 이렇게 부연했다.

“목회가 무엇인가를 주군께 날마다 질문하는 것이 목사의 삶이고, 사역이 어려우면 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또 하나님께 엎드려 질문하는 삶이 목회자의 연속적인 일이기에 목사는 질문하는 자라는 점에서 평론가의 글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목사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할까? 아마도 패배를 지적당할 것이라는 염려와 공포 때문이리라. 한두 번 당하는 지적이 아니라 여러 차례 당하는 지적이다 보니 몸을 사리게 된 것도 한 몫 하기에 아예 질문을 포기하려는 것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곱씹자. 하나님께 질문을 포기하는 것은 성찰을 포기한다는 말이자, 공부하지 않겠다는 자포자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형철의 갈파는 목사인 우리들 역시 민감하게 심비에 새길 교훈적 권면이다.” (이강덕, “독서가 설교에 미치는 영향”, 2022년, 4월 21일 DPA 발제 소논문에서)

20일 수요일, 수요 설교 준비를 마치고 1층 사무실에 나가보니 반가운 소포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글벗이자 존경하는 선배 목회자이신 김기석 목사께서 보내주신 신간도서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였다. 하루 독서 일과가 정해져 있지만 인터셉트해서 어제와 오늘 감사함으로 읽었다.
2017년, 필자는 저자가 출간한 13권의 책을 틈틈이 읽었는데 그 리뷰를 모아 ‘김기석 글 톺아보기’(동연 간)라는 제하로 출간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저자의 글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쉬워 조금은 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용기(?)가 글쓰기에 재주가 없는 필자에게 일을 저지르게 했다. 이후로도 저자가 출간한 책은 독서 일 순위였기에 열심히 독서했고 이번에 보내준 책도 밑줄 치며 읽었다. 이후 그의 글은 영락없이 내 목회의 밑절미가 되곤 한다.
저자는 질문하는 목사다. 그것도 집요하게 질문하는 목사다. 때로는 주군께 묻고, 때로는 본인에게 묻고, 또 때로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필자는 그가 행하는 이런 질문함에 매료된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p,274)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길 위 적당한 지점에 멈춰 선 채로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중간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잊지 않으셨지요?”(p,288.)

웨슬리가 던진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인 ‘기독자 완전’에 대해 무감각한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던진 이 글말은 현장 목회자인 내게도 비수가 되어 꽂혀 아팠다. 저자는 이렇게 필자를 언제나 몰아세운다. 아이러니다. 그래서 너무 좋다.
2021년 한 해 동안 섬기는 청파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1년간의 편지글을 보며 바울 사도가 고린도공동체에 보낸 4개의 편지(두 개는 분실되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지만)에 담긴 고민하고 질문하는 바울의 성정을 발견하며 훑었다. 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위로와 격려만 이 글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무너지고 있는 지구 환경, 왜 죽어가야 하지를 던진다. 미얀마와 아프카니스탄의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아픔 나눔이 있다. 아마도 2022년의 글까지 포함되었다면 저자의 성정은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에 살고 있다가 죽음을 당한 아이들의 피울음도 담아냈을 것이 분명하다.
라오서가 자신의 작품인 ‘루어투어 씨앙즈’에 담은 글 소개를 읽다가 필자는 소리 없는 울음으로 저자에게 지지를 보냈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라오서, “루어투어 씨앙즈 2”최영애역, 통나무, 1992,p,495. 본서 243p 재인용)

필자가 이 대목을 울음으로 삼킨 이유는 서쪽에 살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야만인이 쏘아댄 미사일로 인해 죽어가야 했던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아이들 대한 쓰라림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문장에 천착했다.

“인간은 누군가의 삶에 응답할 때 인간다워집니다.” (p,49.)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국어선생님이 들려주셨던 환상적인 동화 같은 교훈을 목사가 된 뒤에 더 민감하게 새겼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선생님이 백지에 써서 보낸 편지에 기록된 다섯 글자를 설명하라고 했단다.
“人人人人人”
설명하지 못하는 제자에게 풀어준 선생님의 답은 이렇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현장에서 긴장하며 새겼다.
“목사면 다 목사냐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지.”
작년에 한강이 쓴 이 글을 만났다.

“신음 같은 바람이 문틈으로 파고 들어왔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년,p,161.)

4,3사건을 복기한 소설에서 한강이 던진 이 문장이 무감각한 나의 심장을 세차게 헤집었다.
목사로 살면서 ‘나’(ICH)에게는 대단히 너그럽고 관대하지만 ‘너’(DU)에 대하여는 너무나도 냉정하게 ‘그것’(ES)로 정의해버리는 나를 여지없이 타격했던 2021년 최고의 비수였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것’으로 비인격화, 비인간화시키는 일체의 것들과 맞선다. 선배 목회자의 이런 용기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리뷰를 줄이기 위해 저자가 글 말미에 남긴 이 글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남기면서도 두렵다. 역시 스데반에게 날아든 돌멩이를 저자가 또 맞을까봐. 하지만 동의하기에 나도 돌 맞을 각오로 남긴다.
“지금 교회는 내상이 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나 예수의 정신을 저버린 목회자들로 인해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교회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동안도 교회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까지도 받아들여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릇된 것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동시에 ‘바른 것’을 옹골차게 붙드는 일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쓸데없는 싸움에 힘을 다 빼느니 차라리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창의적으로 노력하는 게 낫습니다.”, (p,316) 

‘아니요’를 ‘아니요’라고 말하고 ‘바른 것’을 옹골차게 붙드는 일이 목사의 일이자 미션인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독서하며 자문했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IVP,p,111)라고 선언했다.
이 대명제는 2022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다. 포스트 코로나가 가까이 와 있다. 나를 비롯한 내가 섬기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 사랑하심에 무감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 때문에 날마다 주군께 엎드린다.  

김기석 목사께 감사를 전한다. 무감각해 질 지음, 또 나에게 회초리를 들어줌에. 나이 육십 초반을 넘긴 성상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일 배워야 하는 필자 같은 무익한 종을 위해  같은 하늘에 살고 있는 저자는 건강해야 한다. 선배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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