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온전한 그리스도인2024-06-11 10:15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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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존 스토트
ㆍ출판사 IVP
ㆍ작성일 2022-05-12 15:29:24

 

존 스토트의 ‘온전한 그리스도인’(IVP, 2019년 간)을 읽고


말장난이지 않을까 싶어 고민스러웠다. 목회를 30년 넘게 하지만 현장에서 사람의 근간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목사라 ‘온전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인간, 조금 더 축소해서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해 솔직히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구렁이가 담 넘어 가듯 어벌쩡하게 정의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지역에서 사역하는 후배 목사가 저술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서평으로 책값으로 대신하는 것으로 퉁(?)치기로 하고. 후배는 책에서 하나의 단어를 제시했다.
‘온생명’(whole life)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정의했다.

“온생명은 한 개체 생명이 품고 있는 모든 차원(정신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의 내적 상호작용 하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어 모든 문화로 퍼져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개체 생명체들의 생명으로서 ‘불완전한 주체성’을 ‘온전한 주체성’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개념이 온생명이다.”(서민석, “생명은 흐른다. life 스타일.zip”, 한들출판사, 2021,p,37.) 

그래서 필자도 이렇게 한정하기로 하며 존 스토트의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로 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을 공급받아 ‘불완전한 주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완전한 주체성’을 갖게 됨으로 자아가 바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이다.
조금은 어려운 언어유희 같지만 존 스토트는 자신감 있게 이렇게 표현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다.”(p,9)

이렇게 말한 저자의 통찰적인 정의는 종교적인 수사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라는 시간적인 부사를 저자가 동원한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대전제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통합성(integration)이다.
저자는 역설한다.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말과 됨됨이가 이원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위의 페이지)

본서는 1980년 영국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인 의대생들을 위한 국제대회에서 행한 저자의 다섯 번의 강의 글이다. 1980년이라고 하니 필자의 학번이다. 대학에 입학한 해다. 이 시기만 해도 복음의 능력이 그런 데로 편만하게 펼쳐지던 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003년에 시무하던 진해교회에서 영국에서 공부한 이력을 갖고 있는 선교사를 감비아로 파송했다. 그녀가 영국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할 때,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목사님, 영국 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향후 20년 내에 영국 교회는 사라질 것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은 시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2000년이라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해였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불과 20년 뒤에 무너져 내리는 절망의 기운이 완연한 영국에서 이 강의를 했다. 모인 수강생들은 전 세계의 수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의학도들이었다. 이런 감회에 젖어 본다. 적어도 이때 존 스토트가 강의한 대로 수강생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면, 그리고 살아냈다면 지금의 영국교회, 전 세계 개신교회의 추락을 막았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다.
첫 챕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인격을 다룬다. 인격을 정의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지정의라는 요소다. 이것을 전제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접근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며, 우리의 감정 또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 복종시켜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성을 통제하시도록, 또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p,28)

반-지성(反-知性)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은 저자의 깊이가 로드십이라는 기독교 최고의 본질에서 승화되고 있다는 데에서 놀라웠다. 지성도, 감성도, 의지도 로드십을 인정하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일성은 오늘 한국교회를 섬기는 일체의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천둥소리다.
네 번째 장에서 윤리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필자에게 공명되었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적인 세상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p,99.)

나는 이 지적을 성별됨으로 읽었다. 저자의 다음 글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갔을 때는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p,104)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유성’이 있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해석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실례가 마태복음 5:13-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의 백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영어성경의 고전인 RSV는 이렇게 적시한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젊은 아이들 말로 표현하자면 빼박(?)이다.
포장하는 신자들이 많다. 빛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소금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어불성설이다. 이 구절만큼은 명약관화하다. A=B다. 소금 자체인 그리스도인, 빛 자체인 그리스도인의 당위는 성별됨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 쟈크 엘륄의 이 한 마디에 나는 전율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문명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사는 것’이다.” (쟈크 엘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대장간, p,95.)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자의 고유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그 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저자는 본질 즉 이 고유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윤리로 접근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의와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의다. 이 의(디카이오수네)를 실천하는 자는 이 명제를 살아내야 한다는 저자의 선언에 지지를 표한다.

“그 분은 우리에게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신다. (중략)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타협을 포기하라. 마지못해 포기하는 마음에서 돌아서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의 자리에 놓으라. 그분을 여러분의 주로 삼으라. 그분의 기준을 따르라. 그러면 여러분의 소금은 짠 맛을 낼 것이며, 여러분의 빛이 비췰 것이다.” (p,123.)

오늘 새벽예배에 진행된 아침 큐티 본문이 고린도전서 6:1-11절이었다. 고린도교회 안에 팽배했던 송사 문제에 대한 바울의 일침 중에 눈에 들어온 텍스트가 7절이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세속 법정에 의뢰하는 참담했던 일련의 일들을 보고받은 바울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권한 말이다. 외롭고 고독한 현장에서 울며 세운 개척교회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개척자의 아픔은 아마도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이었으리라! 이 아픔의 참담함을 알았기에 바울은 차라리 당하라고 말한다. 억울해도 차라리 당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대처하지 말라고 간곡히 청한다. 이 구절을 본문으로 큐티 내용을 오늘 교우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홈페이지를 열면 보이는 교회 개척 의미다.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치욕적인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교회가 되도록 교회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대의 절망이 있지만, 전술했듯이 불완전한 주체성으로 조각되어 있는 ‘나’를 완전한 주체성이 있는 하나님의 ‘나’로 변화시키기  위해 로드십(Lordship)의 기저에서 내 삶을 살아내자. 살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중단함으로 인해 적어도 세상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쪽팔림(?)은 당하지 말자.
얼마 전에 읽었던 김기석 목사의 글이 아직도 온기로 내 자아를 데우고 있다.

“우리는 선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해류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다.”(김기석,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pp,476-477.)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끝내는 이길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