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옥한흠 |
---|
ㆍ출판사 | 하온 출판사 |
---|
ㆍ작성일 | 2022-08-15 09:21:01 |
---|
옥한흠의 ‘목사가 목사에게 (1)(2)’를 읽고 (하온 출판사, 2021) “아들아, 아버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목사인가?’의 물음을 던져 보았단다. 물음 뒤에 좌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썩 괜찮은 목사로 살지 못한 자괴감을 느꼈다. 그리고 남은 사역의 기간 동안 후회하지 않는 목회자로 서야 하겠다는 내적인 다잡이를 했단다. 이제 신학교에서 천방지축으로 하나님의 학문을 접하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목회자로서 은혜의 걸음을 디딘 故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고 뜨거워지는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구나. 오늘도 승리하자.”
2014년 1월 22일에 아들에게 도서출판 은보에서 출간한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를 읽고 전달해 주며 쓴 사족이다. 그러고 보니 8년이 흘렀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이제 내년이면 안수를 받게 되는 걸 보면 시간이 참 빠르다. 지난 달, 하온 출판사에서 내게 책을 보내 주었다. 8년 전에 읽었던 옥한흠 목사가 사랑의 교회의 부교역자들에게 교역자 예배 시간에 전했던 설교들을 모은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1’과 옥 목사께서 살아생전 중요한 목회자 훈련 세미나와 집회에서 전했던 메시지 원고를 추려 출간한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2’를 보내주어 다시 한 번 짬을 내서 글 여행을 했다. 이미 다른 형제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 ‘은보’에서 보내주어 8년 전에 읽었던 옥고들이지만, 조금 더 증보된 글들을 읽으며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책과 여행하는 내내, 내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내 신학적 스펙트럼과는 결코 맞지 않는 대형교회에서 사역한 목회자의 글을 읽었다는 것과 동시에 그의 글에 대한 북-리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목회를 실패한 패배자의 넋두리라고 몰아붙여도 할 수 없지만 나는 메가 처치에 대해 생리적으로 관심이 없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 목회신학적인 성찰의 목표는 메타 처치였다. 그러기에 메가 처치에 대한 관심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려고 했고, 대단히 시니컬한 태도를 보인 사람이 바로 나였기에 내가 고 옥한흠 목사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글에 대해 리뷰를 남긴다는 것은 정말로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기에 나도 놀랬다, 몇 년 전에서 신학교 동기 목사가 설교학 Ph,D 학위 논문으로 옥한흠 목사를 조명했고, 친구가 보내준 박사 학위 논문을 박사 학위가 없는 내게 북 리뷰를 남겨달라고 해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으며 졸고를 보낸 적이 있었다. 리뷰에서 옥한흠 목사의 설교에 대해 비평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적인 메시지가 거의 보이지 않는 보수성에 대해 비판했다. 동시에 중간 중간에 보이는 주석적 오류들까지 지적하며 비평적 리뷰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한흠 목사의 이런 부족함들이 내게는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대형교회를 섬겼던 목사였지만, 그가 남긴 복음적인 본질에 대한 초심을 사수하려는 몸부림이 내게 벼락과 천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펜데믹 전에는 일 년에 두 번 사랑의 교회 수양관에 올랐다. 재충전이라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번-아웃 직전의 나를 추스르기 위해서다. 그리고 방문하며 그곳에서 영면하고 있는 옥 목사님의 묘소를 방문한다. 방문하면 언제나 그 앞에서 목사란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하고 돌아온다. 주지하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샘터교회 정용섭 목사는 대단히 시니컬한 목회자이자 조직신학자다. 그가 본인이 집필한 대형 및 유명교회 목회자들의 설교 비평집에서 대형교회 목사로서는 유일하게 칭찬(?)이라는 화두를 비평과 함께 남긴 유일한 목회자가 옥 목사다. 옥 목사께서 사역의 주제인 제자훈련을 통해 훈련시킨 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향기를 발하며 사는가에 대해 회의적 시선으로 사역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한흠 목사의 개인적 평가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으로 논평한 정 목사의 글을 보면서 혹독한 진보주의자에게서조차 나름의 정체성을 인정받은 옥한흠 목사는 분명 한국교회의 또렷한 목사상을 남긴 어른임에 분명하다는 동의를 나 또한 한다. 그 분을 향한 내 소회는 그래서 항상 이렇다.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조금만 사시지. 조금 만 더…”
목사인 내게 走馬加鞭으로 다가온 몇 가지 글을 떨림으로 소개한다.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은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 손에 피가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 겉은 번지르르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들, 바로 이들을 놓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1권, p,36)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목회자 스스로가 영적으로 피폐할 수 있단 말인가! 로 들렸다. “담임목사가 시키는 일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십시오.”(p,56.) 사정이 이런데 어찌 하나님으로부터 조명을 받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로 들렸다. “교역자들이 사역하는 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p,69.) 권위주의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다. 목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쪽팔리는 것은 영성의 부재로 인해, 지성의 얄팍함으로 인해 성도들로부터 깔봄을 당하는 것이다. 어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단 말인가! 로 들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염증이 많은 세계가 교역자 세계입니다.” (p,78) 철퇴(鐵槌)였다. 나는 후배 동역자가 질문할 수 있는 선배인가를 곱씹었다. “전문직의 약점은 자기 기술을 팔아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직업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p,106) 설교를 통해 예수를 파는 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말로 들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눈물이 없다면 목사로서 이미 변질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p,162) 바울에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기시킨 눈물의 목회가 내 목회가 되어야 함을 각인 시킨 메시지로 받았다. “은혜 없이, 감격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1급사기나 다름없습니다.”(p,245) 필립 얀시가 달라스 윌라드에게 물었다. “목사님,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은혜지요.” 절절하다. 은혜가. 어찌 이 은혜 없이 목사로 살 수 있던 말인가! “사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도 없습니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이 악습으로 몸에 배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얼마나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2권, p,28) 이 문장은 서재에 스크랩을 해 두어 서고에 꽂아둔 문장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한 번 보고 시작한다. 선배가 선언한 엄중한 촌철살인이다. “우리는 지도자이기에 남의 것을 카피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목회철학을 가져야 합니다.”(p,135)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본으로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복사본으로 살고 있다.”고. 내 것이 없는 목사의 삶은 재앙이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전 인격을 사로잡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파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없다고 할 때 십자가의 설교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의 이야기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이고, 살아 있는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렸다는 이야기에요.”(p,198)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나를 전율하게 한다.
“여러분에게 복음의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처럼 은과 금이 풍부하고 순풍에 돛단 듯 계속해서 부흥하는 교회에서는 시늉만 하다가 패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잠자기 좋은 편한 교회에서 사역한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적으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 앞에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의 육성으로 들리는 유트브 상의 사자후가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구금한다.
이제 8년 여 뒤에 나는 목회의 현장을 떠난다. 내 목회의 뒤안길에 무엇이 남을까? 두렵고 떨리는 질문이다. 그가 떠난 지 12년이 되어간다. 그가 떠난 후, 그가 사역했던 사랑의 교회도 그의 정신을 상당수 많이 잃어버려 한국교회가 염려하는 교회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더 그립다. 조금만 더 사시지 하는 마음이 통절하게 내게 있다. 하지만 또 반대편에서 이런 생각을 스멀댄다. 잘 가셨다고. 한국교회의 아픔을 더 이상 보지 않고 잘 가셨다고. 시인 나희덕이 읊조렸다. “이 낯선 방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소리들이 함께 있다”(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110.)
소리가 있어서 감사하다.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