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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저 만치 혼자서2024-06-11 10:1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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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훈
ㆍ출판사 문학동네
ㆍ작성일 2022-08-17 16:22:32

 

김훈의 『저 만치 혼자서』를 읽고(문학동네, 2022)


“늙어서 닥치는 모든 비정상이 정상이다.” (김훈, 연필로 쓰다, 문학동네, 2019, 460.)
진갑을 지나는 금년이라 그런지 작가의 이 필치(筆致)가 얼마나 위로가 되든지 기쁘기까지 했다. 아내는 벌써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지만 비정상적인 것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그렇다.
나는 우리나라에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조금의 주저함 없이 작가 김훈을 뽑는다.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356)
이 대목을 읽다가 치를 떨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나으리의 몸이 수군의 몸입니다. 그렇지 않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7, 171.)   
오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의 행태를 보면서 칼의 노래에서 읽었던 이 한 장면을 수면 위에 다시 올리고 싶어졌다.
“거기에서 시간은 발생 이전의 습기로 엉겨 있었고 진행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안개로 풀어져서 허공에 밀려다녔다. 그 뿌연 시간의 안개가 갈라지는 틈새로 물이랑 저편 세상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김훈, “공터에서”,해냄, 2017, 12)
누가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싶어 밑줄을 그었다. 그는 천재적인 글쟁이다.
“현의 노래”(2007년), “공무도하”(2009년)에서 그만이 펼칠 수 있는 치열한 삶과 세밀한 협주곡들을 나는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그의 글에 대한 팬덤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글에 중독된 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그의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에 말이다.
아직은 읽지 않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이 휴가처에서 읽은 ‘하얼빈’도 섭렵해야 할 이유다.
7개의 단편을 묶어 옴니버스 식으로 묶은 ‘저만치 혼자서’는 작가가 숙제하는 느낌으로 쓴 소설이다.
2017년에 발표한 ‘공터에서’ 에필로그를 보면 이런 작가의 소회가 있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며 싸웠다. 사소한 것들의 싸움을 말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보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중략) 나는 이제 그 기억들과 인상들이 내 속에서 소멸되기를 바란다.” (352)
아마도 작가들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 게다. 분명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이 글을 쓰면서 소멸되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불과 5년 만에 본서에서 또 다른 기억의 파편들을 쏟아냈다. 작가들의 운명인가 싶지만 독자인 나는 행복하다. 그의 글을 또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7개의 단편은 사람 사는 이야기다.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다.
『명태와 고래』는 군대와 경찰 그리고 검찰과 법원이라는 국가 권력의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힌 이춘개(소설명)의 이야기다. 국가권력에 의해 도무지 의미도 모르고 스러져간 이 땅의 사람들이 어찌 이춘개 만이겠는가! 소설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자행한 폭력의 고통을 이렇게 고발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이제 닿을 것인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海底面)인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302.)
김훈은 이춘개를 통해, 서늘하고도 또 서늘한 권력의 폭력이라는 괴물과 글로 맞선다. 피해 당사자는 지금 없지만 작가는 그의 원한을 연필로 푼다.
내가 살고 있는 제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풍기읍에 자리 잡고 있는 동양대학교는 정 아무개씨로 인해 유명세를 탄 대학이다. 제천에서 영주로 넘어가는 긴 터널, 죽령터널을 빠져나가면 고속도로 광고판에 이런 홍보 문구가 적힌 광고탑이 눈에 들어온다.
“공무원사관학교, 동양대학교”
4년제 지방대학생은 대도시의 대기업 같은 곳에 취직하는 생각을 아예 같지 말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그것이 장땡(?)이라는 열감을 주는 광고 문구다. 지방대학에서 뭘 더 이상 바라는가의 치부함이며, 이 나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영자』 편을 읽다가 구준생들의 삶을 다시 복기했다, 10명 중 한 명이 붙고, 9명은 낙방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좌절한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를 이해하게 하는 현실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마음도 내 마음과 일맥상통하리라 본다.
『저만치 혼자서』는 옴니버스 소설의 대미다. 그래서 제목으로도 올렸다. 은퇴 수녀들의 마지막 종착지 ‘도라지수녀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구도자의 마지막을 작가는 다뤘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간 앞에 죽음을 예비하지 않았고, 죽음은 죄의 대가로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인 운명이지만 하느님은 그 운명 안에서 부활과 신생을 약속하셨으니, 그것이 당신의 권능으로 베푸는 사랑과 희망이다.”(221-222)
도라지 수녀원을 책임지고 있는 사목담당 신부의 말이다. 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수녀들에게 강론의 내용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지향성이다.” (223)
신학의 내용은 이렇지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신학적 정의처럼 멋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평생을 수녀로 살아온 수도자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작가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죽음을 수사어구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그냥 죽음의 길은 죽음의 길로 인정했으면.
목사로 사는 나이기에 역시 죽음을 신앙적인 수사어구로 과장하거나 포장하려고 의도한 적이 왜 없겠나 싶어 작가와는 배척점이 있는 자가 나일 것이라는 착념도 해 보았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죽음은 ‘저만치 혼자서’ 겪어야 하는 가장 고독한 여행의 끝으로 여겨주고 여기는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
김훈의 장점은 정직하다는 데 있다. MSG 양념을 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 글마저도 포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죽음은 사별의 절망이 아니라, 현세의 삶을 이끌고 또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전개다.” (연필로 쓰다, 407) 

여름이 끝나기 전, 글벗들은 꼭 한 번 들춰 보기를 기대한다. 슬프지만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