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정용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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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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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9-22 21:2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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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의 “목사 구원”(새물결플러스 간, 2020년)을 읽고 저자는 필자의 신학교 선배다. 서울신학대학교라는 모교의 선배 중에 읽을 책을 줄곧 출간해 주심에 후배로서 먼저 감사의 인사를 글로 대신한다.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참 많은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필자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독서를 위해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대단히 중요시 여긴다. 어찌 보면 독서 목록을 정하고 읽는 것부터 작가의 글쓰기는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에 나 또한 이 작업을 대단히 신중하게 진행한다. 새해가 시작이 되면서 약 1년에 걸쳐 약 100권에 웃도는 책들을 구입하여 공부하며 여행한다. 독서 여행을 통해 얻는 환희는 글벗으로 활동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최고의 감동이다. 반면, 정말 예상하지 않았는데 기대하고 구입한 책이 실망스러울 때 적지 않은 분노가 일어난다. 경제적인 품을 팔아 책을 구입한 것에 대한 분노는 차치하고, 다가오는 분노는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한 속상함 때문이다. 아주 가끔 이런 기막힌 일을 경험할 때가 있어 책 구입은 더 더욱 신중 모드다. 본서는 2020년 간(刊)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늦깎이 지각생인 셈이다. 전편이었던 ‘목사 공부’를 읽고 정말 많은 배움을 받았기에 본서도 곧바로 읽을 생각이었는데 게을러서 지각했다. 지각한 죄로 조금 더 열심히 섭렵하려 했고, 그 결과 역시 선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감사했다. ‘목사 구원’ 저자는 저자답게 도발했다. 목사에게 구원을 논한다는 것이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겠는가! 물론 저자는 목사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읽고서 느낀 독서의 評은 목사들을 조직신학적 접근으로 다시 공부시키기라고 재해석하고 싶었다는 점이다. 저자 스스로가 조직신학자이기에 아마도 자신이 제일 잘 하는 것을 현장 목회자에게 던지고 싶었으리라! 아마도 반응은 두 가지일 게 분명하다. 첫째는 본서의 반대편에서 비평적 차원에서 글을 읽은 독자들이 한 부류일 것이고, 두 번째 부류는 긍정적 평가로 본서를 읽고 마음을 다잡이 한 글벗들 일 것이다. 전자는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폄하하는 그룹일 것이고, 후자는 나름 불편하지만 저자의 비수를 받고 반면교사를 삼으려고 하는 그룹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어디에 속할까? 혹시나 첫째 부류들에게 돌멩이를 맞을지 모르겠지만 자수한다. 필자는 후자다. 몇 년 전, 저자가 저자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한국교회 유명 목회자들에 대한 설교 비평서 1-3권을 읽으면서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상당수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의 평 중에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몇 몇 사람들이 있다. 김영봉, 이민재, 민영진, 이재철, 김기석, 임영수 목사 등등은 저자 때문에 지금도 나에게는 그들의 목회나, 설교, 그리고 철학을 벤치마킹하도록 독려하는 동역의 밑그림들이자 길벗들이 되었다. 사족이 너무 길어졌다. 본서의 리뷰를 하려 하는데 앞서 전제한다. 필자는 저자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적지 않게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같은 신학교 선후배 관계이지만 신학적 성향과 성서해석에 대한 차이 정도라고 해 두자. 왜냐하면 필자는 저자의 이론과 신학적 조망들 중에 상당수 생각을 같이 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좁혀질 것 같지 않은 갭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 물론 이 점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의 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백전백패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소극적 반응이라고 필자에게 공격할지 모르겠지만 조직신학을 전공한 이론신학자와 실천신학을 전공한 현장 신학자의 논쟁에서 결코 현장 목회자는 신학적 깊이로 조직 신학자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이는 해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실력의 근간으로 볼 때 조직신학자의 이론적 앎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경지에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자와 필자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좁혀질 수 없는 여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바른 것이고, 틀린 것의 차이가 아니라 다름의 차원일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는 저자가 제시한 가장 시원적인 담론들에 대해서만 나누고자 한다. 제일 먼저는 공감의 필드다. 저자가 말하는 목사 구원에 대한 공격적인 담론 제시를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이 책을 구입하여 직접 섭렵해 보면 저자의 일갈이 대단히 불편해도 어쩔 수 없이 정서적, 신앙적으로 동의해야 하는 면이 여지없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런 경우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목회는 동시에 절대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없다. 목회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전념할 수 없다.(17)” 듣고 있노라면 저자를 한편으로 막 성토하고 싶지만, 영적 내공으로 무장한 목회자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갈파에 아멘 해야 한다. 왜? 사실이니까. 목회의 열정과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멘 했다. 피해갈 수 없는 지뢰다. 도리어 목회의 열정으로 무장한 자들 중에는 자기 열정으로 인해 넘어진 선후배들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자기 확신에 찬 목회자의 말을 최대한 경계하는 편이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의 갈파는 내 지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둘째, 이것도 동의한다. “성서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역설적으로 모르는 게 더 많아 진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당연히 여긴다.”(21) 교만을 빙자한 겸손의 포장이 아니다. 저자도 역설했지만 필자도 손들고 지지한다. 특히 이 부분은 더 그렇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 말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내가 하나님을 완벽히 안다면 100%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내 부족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다만 저자가 역설한 대로 알지 못하기에 늘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질문하기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태도는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22) 저자는 이런 면에서 필자와 너무 닮았다. 불온하지 않은 태도로 어떻게 진보할 수 있나! 이것을 전제하기에 저자의 비수가 크게 꽂힌다. 한국교회의 정서는 질문이 불온하다는 정서다. 질문을 하면 왠지 삐딱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교회 분위기다. 해서 그냥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이 신앙 좋은 신자처럼 간주되는 아픔이 교회 안에 있다. 저자가 이것을 알았을까! 그는 이렇게 직격했다. “한국교회는 목사가 삶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 모르는 게 오히려 목사 노릇하기에 더 좋은 토양이다. 교인들 대부분은 세상살이에 지쳐 있기에 교회에 나와도 단순하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종교적 위로만 받고 싶어 한다, 목사가 그런 종교 심리를 잘 이용하면 목회에 성공할 수 있겠으나 목사 자신은 시나브로 시든다.” (36) 저자가 신학교 선배인 것이 자랑스럽다. 물론 저자도 젊은 시절, 조직 교회 안에서 사역할 때 이렇게 진단하지 못했다. 그것이 조직의 생리니까. 하지만 그는 지천명의 나이에 자유 함을 택했다. 동시에 신학의 지평도 넓혔다. 더불어 더 학문적인 지평을 발전시켜 나아가다보니 전술한 의미들을 자기의 목회 철학과 목사의 정체성으로 만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목사가 목회의 승리를 위해 살아야 하는 데 목회의 성공을 위해 패러다임을 바꿀 때 변질되고 타락하며 시든다는 저자의 일설에 격하게 동의한다. 이제 다름을 이야기 하고 싶다. 제일 먼저 나누고 싶은 담론은 저자가 갖고 있는 목회 현장성에 대한 遊離와 遼遠함이다. 저자의 예배에 대해 이렇게 갈파했다. “예배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바른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 본질에 근거하여 각각의 예배 순서에 집중하는 것이다.”(283)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 행위 자체가 아니라 예배에서 일어나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다.” (294) 저자는 예배 순서에 대한 집중 그러니 예배 행위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예배의 행위가 종교적 감수성과 세속적 욕망만 자극될 뿐 하나님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게 하며 그런 예배는 차라리 드리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강하게 비토 했다. 적어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이런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예배 행위가 없는 하나님의 관계 회복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상당수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오해할 것 같아 부연한다. 예배 행위라고 할 때 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순서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오해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필자는 인간의 경험하는 일체의 삶이 예배 행위가 될 수 있다는 믿는다. 저자는 종교성을 종교의 유익을 위한 도구라고 맹공하지만 종교성은 가치중립적이다. 종교성이 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삶의 자국마다 종교적인 인자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왜냐하면 인간아 살아가는 현장이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 행위는 삶이다. 삶을 차치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할 수는 없다. 필자는 예배 행위가 곧 삶이라고 믿기에 예배 행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무리수임을 밝힌다. 수 년 전에 철저한 무신론 과학자와 범신론적인 종교학자와 과학 문화 속에서의 한국 신학을 고민하는 신학자가 공동으로 토론한 옴니버스 형식의 글인 ‘종교 전쟁’을 너무 재미있게 섭렵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종교를 말살해 버려야 하는 정신의 바이러스라고 과학자답게 정의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글을 기억한다. “진화론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크게 세 가지로 보며 그렇게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종교는 인간 마음의 ‘적응’(adaptation)’으로 보는 견해이고, 두 번째는 종교가 다른 인지 적응의 ‘부산물’(byproduct)이라는 견해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종교 현상을 ‘밈’(여기서 밈이란 도킨스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로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를 뜻하는 gene와 운율이 맞도록 meme라고 지음)의 역학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장대익,신재식,김윤성 공저, “종교전쟁”, 153-154) 그의 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본 종교 분석이었다. 물론 이 분석은 장대익의 독창적인 분석은 아니었고 ‘만들어진 신’에서 발표한 리처드 도킨슨의 이론에 동의하며 인용하며 몰아붙인 도발이었는데 바로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라고 정의한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핵산과 같은 유전 물질을 제외하고는 세포로서의 특징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에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지 않고는 대사 활동, 증식도 할 수 없어 우선 숙주 세포의 핵에 침투하여 세포의 유전 정보 사이에 자신의 유전 정보를 끼어 넣고 세포가 가진 영양분을 이용해 바이러스를 복제하도록 명령을 내려 정상 세포의 기능을 마비시켜 병들게 하는 존재라고 지칭했다. 이어 종교가 바로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이런 바이러스이고 해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런 차원에서 종교를 정의한다면 종교는 현대 과학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전염성이 강한 고등 미신일 뿐이라고 맹공 했다. 이렇게 독설한 장대익의 이론은 리처드 도킨슨의 사상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초록이 동색인 것처럼 보인다. 장대익의 도발에 제일 먼저 논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의 정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마비되고 병드는 가치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인가의 제 문제이다. 생략했지만 장대익은 과학적 통계에 의하면 기도는 전혀 의미가 없음을 강력하게 본인의 소논문에서 피력한다. 그 이유로 기도를 했다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고, 더 잘되는 경우는 더 더욱 아니고 기도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응답들은 이현령비현령식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 자의적 감정의 확대 해석으로 폄하하여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런 일체의 종교적 행위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이기에 이제는 과학에 의해서 박멸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반론한다. 필자가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효과’ 때문이 아니라 ‘의미’ 때문이다. 무신론적인 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미’라는 개념에 대하여는 무식할 것이 분명하다.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니 생각을 혹시 했어도 그 의미를 또 역시 과학적 분석의 차원으로 몰고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삶 즉 예배의 의미란 무엇일까? 섬기는 교회에 팔순이 되신 권사님이 계신다. 당신은 젊어서 남편이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당해 거의 정상적인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반평생의 삶을 경험하다 이별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있다가, 큰 아들이 간경화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은 젊은 나이에 척추 사고를 당하는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다가 20년 만에 또 그녀의 곁을 떠났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나? 목사인 필자는 권사님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여력이 별로 없다. 솔직히 말하면 목사로 살고 있는 나 역시 그의 가정에 위로를 전달하기는커녕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으니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부모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자식을 앞서 보내지 않는 것이다. 100% 동의한다. 소개한 권사님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고의 저주를 받은 셈이 된다. 이 정도면 무너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막상 당신은 아프고 힘들고 또 아프지만 이겨내고 있다. 신앙의 힘이라는 효과가 아니라 의미로 사신다.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마땅히 이렇게 비웃듯 설명할 것이다. 정신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고. 그런데 이상하다. 인간의 영적 영역을 그렇게 생물학적인 차원으로 해석하는 그들이 왜 그리 천박해 보이는지 말이다. 권사님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전 영역은 예배 현장이다. 그러기에 예배 행위와 하나님과 관계를 유리하여 해석하는 저자의 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하나만 커멘트 하자. 저자가 말하고 있는 ‘계시’에 대한 신학적 조망은 대단히 공격적으로 이성적 인식론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원론적으로 필자와도 큰 차이는 없다. 저자의 이런 시도가 계시 이해를 위한 신학의 이론적인 한 방법론이라는 데에서 필자도 동의하고 수용한다. 하지만 저자 역시 필자처럼 목회를 하는 현장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계시에 대해 이성적 인식이 결여된 일체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데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저자의 단호함에 대해 일부는 지지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계시를 이해하는 현장성에 대한 신학적 차이 때문이다. 저자는 특별계시에 대해 강조한다. 동시에 자연계시에 대해서도 그만의 독특한 조직신학적 체계로 계시를 설명해 간다.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현장 목회자인 필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고 교제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해 전혀 이성적으로 생각할 없는 여백에서 일하심을 수없이 목격했다. 한 실례를 들러보자. 장례식을 인도하는 것은 목회자의 사역 중에 대단히 중요한 사역이다. 흔히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믿는 자의 죽음에 대해 장례를 인도하는 것은 목사에게 있어서 대단히 큰 축복이고 은혜의 극치다. 반면 믿지 않는 자의 죽음이나, 혹은 믿는 자의 죽음 중에 상식적이지 않는 죽음에 대해 장례를 인도해야 하는 목사의 사역은 지옥 그 자체다. 원론적으로, 교과서적으로 후자의 장례를 인도하려면 순교적 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 교과서적이지 않은 장례를 인도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리어 상황 윤리에 따라 장례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마치 의무와 같이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근본주의적이거나 보수적인 자들이 타협이라든지, 물러섬이라든지 등등의 언어로 비난한다.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비신자들의 장례를 수없이 인도했다. 힘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도그마로 특정한 일하심이 아니라 도무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으로 일하시는 경우를 더 많이 경험했다. 불신자 장례식에 임한 구원의 은총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말하면 이재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세웠던 마녀사냥이 생각난다. 필자가 말하는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을 신학이 제정한 도그마나 이성적 계시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본인의 조직신학적 성서해석에서 어긋나면 인정하지 않는 고집이 있다. 이 고집은 현장성과 유리되어 있다는 증거다. 사람보다 중요한 이성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신학교의 조직신학적인 교실에서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장은 그렇다. 그래서 현장이 중요하다. 아, 물론 필자가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을 두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무식한 목사의 궤변정도로 비난하는 자가 있을 것을 안다. 뭐 그러려면 그러라고 하고 싶다. 그게 대수는 아니니까. 무엇을 강조함인가? 나는 원론적으로 저자의 조직신학적 갈파에 대해 대부분 수용하는 편임을 전제했다. 하지만 저자와 필자가 매치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현장성의 갭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좁혀 질 것 같지 않다. “목사로서 나는 목회를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설교를 통해 나는 구원을 받으려고 구원을 경험하려고 노력한다.”(320)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을 적시한 저자는 다시 한 번 말한다, “구원은 내가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다.”(315)
다름이 있지만 선배의 이런 진솔한 고백이 있어 나는 그를 존경한다. 선배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