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차준희 |
---|
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
ㆍ작성일 | 2022-10-23 21:28:55 |
---|
차준희의 “시인의 영성Ⅱ”(새물결플러스 간, 2022년)을 읽고 555페이지다. 참고문헌을 뺀 本書의 분량이다. 저자는 필자가 글을 쓰면 습관적으로 선생 노릇을 한다. 그 중에 대표적 가르침은 글을 짧게 쓰라는 잔소리다. 너무 많이 야단을 맞아서 이제는 내성이 생겼다. 다시 강조하지만 555페이지다. 저자가 필자에게 책을 보낸 준 게 9월 8일이다. 어제 독서를 마친 시간이 오후 9시 55분이다. 그러니까 꼬박 한 달 보름이 걸렸다. 아, 물론 저자의 책만 붙들고 목사로서의 일체의 사역을 중단한 채 독서에만 열중했다면 하루 정도면 친구의 책을 공부할 수 있었겠지만, 목사가 할 일이 좀 많은가, 555페이지를 하루에 다 읽게. 또 하나 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필자가 책을 설렁설렁 읽으면 영락없이 화를 낸다. 성의가 없다느니, 내 책이 그렇게 읽을거리가 없는 책이냐는 등등 나를 또 나무란다. 여하튼 평생 웬수가 분명하다. 읽느라고 죽을 뻔했다. 조만간에 귀국을 할 텐데, 성의가 없다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아, 북 리뷰를 저자와는 달리 짧게 남겨본다. (ㅎㅎ)
1. 목회자들이여, 이런 책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 목사가 출간해 준 것에 감사하자. 아부성 발언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알림이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연이어 출간한 ‘시인의 영성 Ⅰ,Ⅱ’에 담긴 저자의 노력으로 탄생한 글감들은 목회자들을 위한 기여도에서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작으로 여겨진다. 목사로 30년 이상을 현장에서 부대끼며 언제나 굶주렸던 것은 균형 잡힌 성서해석의 교과서가 그리 흔치 않은 데에서 오는 아쉬움이다. 균형이란 함은 성서신학적인 깊이를 내포한 성경 각 권에 대한 해석과 그 해석의 틀이 목회 현장이라는 교회 강단에서 과연 어느 정도 적용되어 기여할 수 있느냐는 균형을 말하는 것인데, 기존에 등장했던 참 많은 책들은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 것들이 대다수인 반면 저자가 출간한 본서는 이런 면에서 수작이기에 하는 말이다. 늘 항상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 수많은 책들의 홍수 속에서 본서는 시편 해석에 있어서 적절한 균형추가 걸맞게 맞추어진 良書라는 점에서 저자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2. 시인들이 말했던 시인의 영성이 근본주의적인 차원에서 강압해왔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지속하여 헤세드, 에메트, 미슈파트, 체데크, 샬롬(p,396) 등등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속성에 집중하고 있다고 고집한 저자의 노력에 공감을 표한다. 필자가 이 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진짜로 원하시는 것을 상실한 채로, 교회 조직과 히어라키적인 견고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권, 순종, 힘, 맘몬 등에서 뒤돌아서려는 저자의 힘겨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곧 필자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같은 공감으로 시인의 영성을 바라본 저자에 대해 격하게 지지했다.
3. 저자가 메시지에 남긴 촌철살인은 현장 목회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insight 자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어야 할 책이다. 가령 77편 해석 후에 저자가 남긴 메시지를 살펴보자. “‘나의 지배를 받는 종교’(1-9)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종교’(10-20)로 전환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하나님을 향한 복종과 믿음’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보잘 것이 없는 자아(the small self)’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더 위대한 자아(the great self)’를 발견하게 하는 경험을 한다.”(p,307) 저자는 계속 발언한다.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축복’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기억의 되새김질’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고백을 선사한다.”(같은 페이지) 놀랍다. 77편을 읽어보지 않은 자가 어찌 저자의 이 갈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필자의 소회는 또 하나 이렇다. 읽어도 이런 정도의 갈파를 한다는 것은 내공이 없는 자 즉 독서의 내공, 신학의 내공이 없는 자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경지라는 토로다. 저자를 디스하려면 북 리뷰를 짧게 써야하기에 더 많은 내용을 소개하지 않겠지만, 본서의 메시지 콘텐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드는 설교자들에게는 선사하는 보화덩어리가 지천에 깔려 있다. 사우스 이스트 크리스천 교회의 교육목사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카일 아이들먼의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the end of me is beginning of Jesus.” 시인들은 51-100편 사이에 이 고백을 수없이 많이 토해낸다. 저자는 각 장의 메시지에서 표현이 조금 다르고, 글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같은 고백을 신학적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공부해야 할, 그리고 배워야 할 신학자의 포효다.
4. secondary sources의 혜택이다.
저자는 시편 안에 담겨 있는 히브리어 중에 중요한 단어들을 분석한다. 예를 들자면 51-100편 사이에 시인들이 야웨 왕권시에 해당하는 작품들에서 상용어처럼 쓰는 하나님 호칭인 ‘야웨 말라크’와 같은 경우다. 통상적으로 ‘야웨 말라크’는 ‘여호와는 왕이시다.’의미로 목회자들에게 알려진 단어이다. 저자는 이 상용어적인 관용구를 시편 93편을 소개하면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로 확장 해석하며 소개한다. (p,480) 흔한 예이지만 목회자들 중에 히브리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 이럴 때 목회자의 연약함을 도와주는 것은 저자와 같은 성서신학자가 제공하는 ‘secondary sources’다. 필자는 근래 섬기는 교회에서 히브리서 연구에 박차를 가하며 강해 설교를 하고 있다. 에스라성경대학원의 양용의 교수와 횃불트리니티의 조재천 교수가 제공하고 있는 히브리서 원어 해석에 대한 ‘secondary sources’는 내 공부의 수훈갑이다. 본서는 시편에 나타난 히브리어 중에 의미 있는 해석을 성서신학자의 깊은 연구를 통해 수준 높게 제 2차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나. 목회를 하면서 시간과 재정이 허락하지 않아 더 업그레이드 된 공부를 하지 못한 목사들의 죄는 무죄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학술적인 공부를 통해 학위를 취득한 자들이 제공해 주는 서비스는 마땅한 것이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제공을 수용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것은 진짜 당사자의 몫이다. 저자는 성서 원어에 대한 수준 높은 제 2차 자료를 제공한다. 마음껏 먹자. 쫄지 말자.
5. 시편 88편의 유감
‘욥의 시’라고 지칭되는 개인 탄원시인 시편 88편을 저자는 ‘하나님의 침묵 속의 임재’라고 부제를 달았다. 저자가 왜 이렇게 제하를 달았는지 이 책을 섭렵한 자는 알게 된다. 욥이 당했던 이유 모르는 고난처럼 시인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에 대해 고개를 젓는다. 영적인 투쟁으로 이 일을 알고 싶어 하지만 묵묵부답하시는 하나님께 분노가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런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기가 막힌 시적 언어로 긍정화 시킨다. “하나님의 침묵 속의 임재”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20세기의 영적 공허를 ‘하나님의 일식’이라고 표현했다. 제랄드 메이는 같은 영적 상태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一說 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식은 경험된다. 아니, 더 솔직하게 접근하자면 주군과 영혼의 깊은 교제를 행하는 자는 이 일식을 더 혹독하게 경험한다. 필자도 수없이 경험했다. 이런 심연의 고통을 해석한 저자는 시편 88편에 의거하여 이렇게 메시지에 갈무리했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철저히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 침묵 속에서도 오직 그분께 끊임없이 마지막까지 말을 거는 데 있다. 우리의 마지막 호흡은 그 호흡을 주신 분이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순간에도 그분께 말을 건네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지 않을까!”(p,431) 그렇다. 저자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 지 안다. 저자가 말한 메시지가 얼마나 은혜로운 결론인지도 안다. 그런데 그래서 조금은 유감이다. 필자는 도리어 저자가 시편 88편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사족을 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저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임재를 느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필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속상하지 임재를 느끼는 차원까지 도달하지 미성숙한 목사다. 목회 현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확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는 목회의 연수가 깊어지면서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을 조심한다. 항상 후회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를 많이 만난다. 그때는 나도 침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왜? 물어보나마다 하나님이 항상 이기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짧게 서평을 쓴 것도 정말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내 서평도 이렇게 길게 쓰냐고 야단칠 것 같아서다.(ㅎㅎ) 차 교수는 나의 브로맨스다. 안식년을 핑계로 미주 부흥회 투어 중에 있는 친구가 건강하기를 줄곧 기도한다. 친구는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사역이 아직도 너무 많기에 아프면 절대 안 된다. 저자가 두 번째로 펴낸 ‘시인의 영성Ⅱ’을 읽고 난 뒤에 책 뒤에 이렇게 썼다. “2022년 10월 22일 오후 9시 50분에 완독. 아들, 차준희 목사의 지성적 영성이 너무 부럽다. 준희는 괴물 급 거인이다. 나는 아들이 이렇게 성장해 주기를 바란다. 애비가.”
주일 저녁인데 숙제 끝냈다. 이제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주일이 가장 멀리 있어 무지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