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9월 17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8:0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는 나에게 점수를 준다면 몇 점?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09장: 목마른 내 영혼 
● 복음성가: 하늘 소망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 본문: 창세기 35:16-22
1) 설교에서 언급된 인물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 뜻을 나누어보자.
⓵ 아브람-아브라함
⓶ 야곱-이스라엘
⓷ 베노니-베냐민
⓸ 다니엘-벨드사살
⓹ 시몬(시므온)-베드로
⓺ 마헬살랄하스바스  

2) 야곱이 막내아들의 이름을 아내가 지은 이름을 포기하고 자신이 다시 지은 이유를 레마로 설명해 보자.
1)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2) 레마로 적용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나는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진솔하게 나누어 보자.
⓶ 나는 내 삶의 여백이 내 것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가?
⓷ 본질 없는 외침과 순종하지 않는 들음과 맞서기 위해 치열하게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께 올린 태신자 명단 작성하고 17일 주일에 봉헌하기 
2. 셀 원 들의 기도제목 빠짐없이 확인하고 리더와 인턴들이 이름 불러가며 중보하기
3. 셀이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중보하기 
4. 공 예배 잘 지키도록 리더들이 솔선수범하고 독려하기
5.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설교요약 (SUMMARY)
본론) 구약성서학자 중에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게르하르트 폰 라드의 설명을 소개 해보겠습니다. “고대인들의 신념에 의하면 이름과  그 이름의 담지자 사이에는 신비한 연관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름은 운명을 내포할 수 있었다. 18절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되어 버린 영적 차원에서 전개된 작은 드라마를 암시해 준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둘려 쌓여 있는 라헬은 새로 난 아기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으며, 이 아기를 일생동안 이런 곤궁의 그늘 아래 있게 할 이름을 지어 준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시작되는 아기의 삶 위에 운명적으로 드리우게 될 어둠으로부터 아기를 구해낸다. 그는 이 불길한 이름을 야곱은 인정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폰 라드, 『국제성서주석-창세기』, 382쪽)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꾼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신학적인 교훈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막내아들의 인생이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를 기대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막내아들의 이름을 바꾼 것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줍니다.

※ 인간이 해석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석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담겨 있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엘리 시대에 블레셋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은 대패합니다. 당시 성소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까지 이끌고 전쟁에 임했기에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믿었던 전쟁에서 도리어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치는 물론이고 전쟁의 리더였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전쟁에서 사망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홉니와 비느하스의 패역함이 낳은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참극의 소식이 실로에 거하고 있었던 엘리에게 보고됩니다. 엘리는 법궤를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충격을 받아 본인이 앉아 있었던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엘리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보고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들을 출산한 끝에 역시 사망하게 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어가며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음을 보고하는데 번역하면 ‘명예롭지 않다.’ 즉 ‘불명예’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사무엘상 역사가는 기록합니다. 성경의 보고들은 이름에 대한 강조점을 확실하게 하는 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가봇’이라는 아들의 이름은 비느하스의 아내가 작명한 것으로 성경은 보고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엘리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없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아브람(한 가정의 아버지)을 아브라함(민족의 아버지)으로 개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야곱(사기꾼, 발꿈치를 잡은 인생)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하나님이 져주셨다.)로 바꾼 것도 하나님의 해석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하명하셨습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 즉 번역하면 ‘노략이 급하고 약탈이 빠름’이라는 뜻입니다.

야훼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시대적 정황에 따른 예언적 상황을 해석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아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을 담보한 이름을 이사야의 아들에게 지어줌으로서 역사적 상황을 대변한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해석이었습니다.
  요한 아들로 태어난 어부는 시몬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을 만나신 주님은 그에게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면서 그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절입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는 즉 페트로스는 바위라는 의미입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면서 그의 인생이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해석하시는 바위 같은 인생으로 변화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실례를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이 정도만 갖고서라도 우리는 충분히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레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이 하나님께서 해석하는 인생이 되기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를 해석하면 언제나 범하는 오류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단히 너그럽다는 점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주는 점수가 후하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A 학점이요, ‘수’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점수가 후하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이며,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면 결코 안 됩니다. 나의 궁극적인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24-25절을 소개합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로마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던 가이사랴 총독 관저에서 기거할 때 만난 당시 총독 벨릭스와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자 권력자인 총독 벨릭스가 복음의 도를 듣고 두려워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무엇이 그를 두려워하게 했을까요? ‘장차 오는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장차오는 심판의 주인은 주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내 삶의 여백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이 나를 조각해서 그 여백에 담을 수 있는 내 삶의 해석을 주님께 드리는 자이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다니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니엘은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하여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갔을 때 끌려갔던 지성적 젊은이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다니엘은 본인만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도 함께 끌려갔다고 다니엘 1:6절이 보고해 줍니다. 이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게 되는데 창씨개명을 당하는 수모 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니엘’은 ‘벨드사살’ 즉 ‘바벨론의 신들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개명되었고, ‘야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하나냐’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사드락’으로, ‘야훼 하나님 같은 분은 누구인가?’라는 의미의 ‘미사엘’은 ‘메삭’이라고 개명되었고, ‘야훼께서 도우셨다’는 뜻의 ‘아사랴’는 바벨론 신의 이름은 ‘느고의 종’이라는 이름인 ‘아벳느고’로 명명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야훼 하나님을 목숨처럼 여기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포로 된 자로서 이방의 땅에서 죽고 싶을 만큼의 치욕과 수모를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니엘 1:1-16절의 담론을 파헤치다보면 반전을 주는 감동의 기사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것처럼 느부갓네살은 왕명으로 포로로 끌려온 유대 지식층의 젊은이들을 선별하여 바벨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재들로 키우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에 따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선발되어 특별 관리에 들어가게 됩니다.철저한 바벨론 식 교육과 문화, 생활습관까지 수용하게 함으로서 바벨론의 사람으로 가공되는 과정을 겪게 합니다. 이 훈련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이런 엄한 왕명을  거부합니다. 바벨론 정부에서 내린 산해진미로 식사하는 것은 거부하고 채식을 요구한 것이 그 한 실례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채식을 요구한 근거는 산해진미로 식사를 한 다른 이들과의 영양상태 비교에서 10일 이후 본인들의 상태가 떨어지면 채식을 포기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결과를 다니엘 1:14-15절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우리는 지금까지 보고한 다니엘 1장의 기사에 너무 익숙합니다. 여러 차례 접해 본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익숙한 다니엘 1:8절을 오늘 창세기 강해에 접목하는 해석은 신선해 보이기에 선택했습니다. 다니엘 1: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 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왕의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환관장에게 왕실 음식을 먹지 않게 해달라고 청했다.”
  다니엘의 이 선언은 단순하게 음식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와 연관하여 다니엘의 선언은 그 이상의 신학적 함의를 담보한 선언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선언은 다니엘이 자신의 삶에 대한 여백을 야훼 하나님께서 그려주실 것으로 믿고 내 삶의 해석자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내 삶의 해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아침에 부산에 거주하는 서희 집사님과 전화로 교제했습니다. 고백 중에 이렇게 진솔한 전언을 해주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목사님, 비록 인터넷이기는 하지만 세인 교회 예배를 참여하면서 한 가지가 조금씩 보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아내는 서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서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또 그런 삶을 치열하게  살아보렵니다.”

  성도라는 삶의 길은 내가 나에게 주는 후한 점수에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길이 녹록하지 않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삶의 여백을 주님께 내어드려서 내 삶이라는 캔버스의 여백에 주님이 그림을 그려가도록 그래서 내 삶을 하나님이 해석하도록 주님을 붙드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까지는 베노니였다고 하더라도 내 삶의 남은 여백이 베냐민이 되도록 분투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학교 후배가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설교의 홍수시대에 진정한 말씀의 기갈을 느끼는 것은 본질 없는 외침과 순종 없는 들음 때문은 아닌가?” 후배의 글을 읽다가 참 명징한 성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질이 담부된 메시지는 내 삶의 여백을 주께서 해석하도록 내어드리자는 선포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순종하는 들음은 내 삶을 그렇게 내어드리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가 세인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그런 목회자는 이강덕 목사가 그런 성도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