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지난 상반기 동안 행복했던 일과 아쉬웠던 일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30장) ● 복음성가: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 말씀읽기와 적용 (WORD)제목 : 열심은 하나님께 있었다. 본문 : 창세기 31:17-42 1) 엘리야가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컸다는 사실을 증언한 열왕기상의 증언을 나누어 보자. 2) 야훼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먼저 일하셨던 사실을 시편 121:4-6절을 참고하여 논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내가 스스로 느끼는 열심이 내 만족을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를 성찰하자. ⓶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간증해 보자. ⓷ 나에게 현몽하셨던 것 중에 복음적인 메시지가 있으면 나누어 보자. | 사역하기 (WORK)※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주중 기도제목 중보하기 1) 혹서기와 장마 기간, 세인 공동체 지체들이 더 강건하도록 2) 환우들의 건강을 위해 3) 2023학년도 대입 지원자들을 위해 (최지훈, 김수연, 지에스더) 4) 세인교회 피선교지를 위해 5) 2023년, 세인교회의 구체적인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6) 군과 해외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사역 하기
1. 맥추감사주일 출석 독려하기 2. 아픈 교우들 손 잡아주며 격려하기 3. 힘들어 하는 지체들에게 중보 약속하기 4. 맥추절 이후 후반기 사역의 승리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론) 20년 10일이었습니다. 야곱이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생면부지의 외갓집으로 피신한지 20년 10일 만에 야곱은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그 동안 하나님이 강복하셔서 주신 선물들을 이끌고 또 다른 위험이 있기는 하겠지만 고향 땅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야곱은 혹시나 모를 외삼촌의 방해와 집요한 훼방이 염려되어 외삼촌이 양털을 깎기 위해 출타한 틈에 자기의 가족 11남 1녀와 네 명의 아내, 그리고 수많은 가축들을 몰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는 하란에서 640km 떨어져 있는 길르앗에 이르러 그곳에서 쉬기 위해 장막을 칩니다. 타지에 나갔다가 돌아온 라반은 조카이자 사위인 야곱이 야밤에 재산들을 이끌고 도주한 사실을 알고 발끈하여 아들들을 대동하고 추적한 끝에 7일 만에 그러니까 총 10일 만에 길르앗에 진치고 있던 야곱을 만나 붙드는 데 성공합니다.
본문 정황에 따르면 야곱을 추적하던 라반의 입장은 물리적인 힘을 통해 야곱에게 해를 가할 것을 전제한 추격이었습니다. 장인, 사위,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는 이미 물 건너간 뒤였습니다. 물질적인 이해타산의 관계는 이렇게 인관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세속적 경향입니다. 7일 만에 추격전에 성공한 라반의 반응은 매우 서늘합니다. 본문 26-29절 전반절의 보고를 나누십시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라반의 이 성토는 오만가지 감정이 섞여 있는 섭섭함의 토로였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은밀하게 도주한 야곱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면적으로는 나의 재산이라고 간주했던 야곱의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 것에 대한 분함이 더 큰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살폈던 라반의 이기적 성향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런 분노가 야곱을 추적하게 된 근원적인 동기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상황이 이런 데도 불구하고 라반은 야곱을 해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폭력을 가하여 그가 갖고 나갔던 일체의 것들을 탈취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본문 24절이 그 이유를 답해 줍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4절을 오택현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고, 그가 떠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이를 상관한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오택현 “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 pp,258-259)
오늘 본문에도 삽입되어 있지만 라반은 야훼 하나님을 믿던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란 지역 즉 밧단아람의 가정 수호신이었던 드라빔을 인정하던 부족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드라빔은 이동성이 아주 손 쉬웠던 우상 형상이었기에 아버지와 같이 우상 숭배자였던 라헬은 남편과 함께 도주할 때 남편 몰래 그 드라빔을 편취하여 갖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밤에 라반에게 나타나 현몽하셔서 경고한 야훼의 경고를 라반은 충분히 무시할 수도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종교성이 있었던 라반은 조카가 믿었던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29절 후반절은 이것을 확신하게 해 주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라반은 내가 너를 해치지 않은 이유의 원인이 야곱이 믿고 따르는 야훼 하나님으로 인함을 분명히 선언하며 나름 그동안 보아왔고 느껴왔던 야훼 하나님께 백기를 든 셈입니다.
그러나 인위적 권위까지 무너질 수 없었던 라반은 에둘러 드라빔 도적질을 거론하며 시비를 이어갑니다. 야곱은 아내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 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도둑질로 다그치고 있는 외삼촌에 대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만에 하나 드라빔을 도둑질 한 것이 발견되면 도둑질 한 그 장본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단언하는 등 사태는 긴박해 집니다. 하지만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데로 도둑질을 한 라헬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드라빔을 찾으려는 라반의 시도를 무력화시켰고 극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야곱이 외삼촌에게 도리어 그 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강력하게 항의하며 자신들의 고향 행에 방해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본문 해석을 마무리하면서 설교자인 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 설교를 듣는 우리 교우들 모두에게 귀한 은혜의 물결로 덮어주는 구절이 있어 소개하고 오늘의 은혜를 적용하겠습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인 4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이시며, 이삭을 지켜 주신 '두려운 분'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으면, 장인어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겪은 고난과 제가 한 수고를 몸소 살피시고, 어젯밤에 장인어른을 꾸짖으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도 읽어보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장인어른은 저를 빈손으로 떠나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곤경에 처한 것과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아시고, 지난밤에 판결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제가 두 개의 성경 번역본을 읽으며 주목했던 구절이 있었습니다. “어젯밤 장인어른을 꾸짖으셨습니다.” (새 번역) “지난밤에 판결을 내려주신 것입니다.”(메시지 번역) 왜 이 구절이 제게 강하게 다가왔는지 아십니까? 자고 있는 라반에게 오셔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반아, 야곱을 건드리지 말라” 자고 있었던 라반의 꿈으로 찾아오신 야훼 하나님을 목도하면서 울컥하는 감동이 임했습니다. 어떤 감동인지 아십니까?
※ 열심은 야곱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시편 121편에 있는 말씀 그대로 내게 적용되었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입되어서 은혜로 전율했습니다. 시편 121:4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렇게 시인을 통해 토로된 하나님의 열심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5-6) 제 1 이사야는 그의 예언서에서 앞으로 전개될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중에 야훼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해 개진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사야 9:6-7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야훼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전능성을 갖고 이루고자 하시는 일체의 것들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어떻게? 열심을 다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일본의 위대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충만한 분이시다. 그런 그가 일을 하실 때 열정적으로 일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께 열심히 있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열정이 있다는 것은 결코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이것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적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심이 너무나도 절실하신 까닭에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에 있어서 높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신다. 그는 어버이가 그 자식을 위험 속에서 구하려고 할 때의 그 열심히 있으시기에 자기의 지위의 높음을 잊으시고, 또 자기가 구하려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할 치욕에 굴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는 자를 구조하시려는 일념에서 커다란 구원을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단어의 설명이다.” (우찌무라 간조가 발표한 1910년에 발표한 성서연구 중에서 발췌)
지난 주간에 기도원에서 교회의 전반적인 일을 위해 엎드렸습니다. 열손가락 잘라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그래도 제 기도의 우선순위는 어쩔 수 없이 김현미 집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입니다. 목요일 저녁기도원 본당으로 향했습니다. 제자훈련이 실시되는 기도원 본당이다 보니 예배당만 보면 실로 엄청난 크기의 본당인데 다행히 아무도 없어 좌석 뒤에 앉아 중보를 시작했습니다. 김 집사의 향후 치료 일정이 6월 30일 이후 결정되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증보했습니다. 항암 치료가 지속되든지, 재수술이 되어야 하든지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니기에 그것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사랑하는 딸의 향후 일정과 치료 과정이 어떤 과정이 되었든지 완치를 기대한다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시간, 제게 조명된 은혜는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일까? 목사로서 내가 할 일이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참을 기도하는데 제게 임한 영적 조명은 이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2-3절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그렇습니다. 내가 엎드려야 하는 이유는 김현미 집사의 치료라는 과정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함임을 다시 한 번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적용한다면 내 열심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열심이 일하도록 만드는 일이야 말로 내가 행해야 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각인하였습니다. 불신앙은 내가 일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환경과 형편을 나를 옥좨도 붙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강하게 어필하며 항의했습니다. 그의 항의를 보십시오. 열왕기상 19:10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다한 대가가 이런 비참입니까? 하나님께 어찌 보면 삿대질 하는 엘리야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엘리야는 고독하게 혼자 싸웠습니까? 우리는 엘리야의 열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만납니다. 열왕기상 19:18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리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열심은 내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떤 시인이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 몸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기석, “희망, 그 빛깔이 있는 삶의 몸부림”, p,56.)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눈물은 우리들이 흘리지만, 울음은 야훼 하나님께서 흘리신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이기는 것은 나의 열심 때문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다. 내가 이기는 것은 울음을 삼키기며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열심에 박수치며 따라가는 열심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나의 승리를 이루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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