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5월 21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최근, 나에게 일어난 잊지 못할 감사의 내용 말해보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391장 - 오 놀라운 구세주
●  복음성가: 은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야곱의 가족 이야기 (4)
● 본문 : 창세기 30:22-24
1) 라헬이 낳은 야쎄프(요셉) 탄생의 의미를 하나님 쪽과 라헬의 측면에서 해석해 보자.
① 하나님 쪽의 의미
② 라헬 측면의 해석  

2) 본문이 주는 레마를 말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나는 은혜를 부여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심도 있게 성찰해 보자.
⓶ 나는 오늘 은혜를 받은 자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③ 태신자를 주님께로 돌려야 하는 당위를 레마와 연관하여 나누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제목
⓵ 태신자 구원을 위해 
⓶ 열린 모임의 승리를 위해
⓷ 끝까지 3차 섬김을 위해
④ 환우들을 위하여 중보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열린 모임 날자 정하기
2. 태신자 초청 대상자 확인하기
3. 열린 모임을 인도할 리더 혹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4. 열린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지체의 가정에 기름부음이 임하기를 
5. 5월 28일 초청 대상자 섬기기 (셀 별로 구체적 담당 설정)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 2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세기 기자는 라헬이 자녀를 생산하게 된 근원적인 시작이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시면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본문에  번역된 ‘생각하신지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카르’라는 단어를 해석한 의미입니다. ‘자카르’라는 단어는 ‘생각하다’ 혹은  ‘기억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동사입니다. 해서 많은 여타 다른 성경 번역본들은 22절 전반절을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다’라고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둘 다 의미가 통하는 단어의 공통점이 있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설교의 의미를 조금 더 강하게 하기 위해 다른 단어 하나를 소개합니다. ‘자카르’는 ‘칼로 베어 낸 자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칼로 베어낸 부분이라면    얼마나 강한 자국이겠습니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장난을 하다가 책상 모서리에 눈가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지금도 제 얼굴 오른쪽 눈가 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움푹 파인 부분이 보입니다. 세월이 무수히 흘렀어도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강하게 새겨져있는 상태를 가리켜 주는 단어가 바로 ‘자카르’입니다.

  본문을 이런 뜻을 적용하여 다시 새겨보십시다. “하나님은 라헬의 이모저모 상황을 대단히 강하게 기억하셨다. 하나님은    라헬이 처한 상황을 인상 깊게 마음에 두셨다.” 이렇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라헬이 전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 전무했던 여인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예로 지난 수요일 설교를 통해 살폈던 합환채 사건이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르우벤이 발견한 합환채를 어머니 레아에게 갖다가 준 것을 알았던 동생 라헬이 남편과의 하룻밤 동침을 조건으로 그 합환채를 달라고 했던 경악할 만한 일을 이미 살폈습니다. 이런 행동은 라헬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제로였음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후에 31장을 통해 보겠지만 라헬은 아들을 낳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없었던 또 하나의 증거가 보고되는 데 바로 드라빔 사건입니다. 창세기 31:19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년 10일이라는 세월을 삼촌 라반의 집에 머무는 동안 교묘히 착취당한 야곱이 드디어 결심을 하고 자기의 식솔들과 가축 등을 이끌고 아람을 떠나 길르앗을 도주하던 날, 라헬이 도둑질 하여 가지고 나온 것이 바로 드라빔입니다. 이 드라빔을 도둑질한 장본인이 바로 라헬임을 창세기 기자가 밝힙니다. 드라빔이 무엇이기에 라헬은 아버지의 집에서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가지고 나오려고 했을까요? 송병현 교수의 주석으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드라빔의 어원과 뜻은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대체로 4가지로 추측한다. 낡은 헝겊 조각, 해몽자, 악령, 치료자 등이다. 비록 단어의 의미는 확실하지 않지만 드라빔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확실하다. 드라빔은 사람 모양을 한 집안의 수호신들로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것이다. 드라빔은 때로 이미 죽은 조상들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 집안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신들의 상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이러한 우상들이 집안의 행복과 번영을 준다고 믿었고, 대대로 집안의 상속물로 자손들에게 전수되었다.”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 560-561)

  우상숭배의 물건이었습니다. 라헬이 라반이 소중하게 여기는 드라빔을 도둑질한 것은 그녀 역시 우상 숭배에 철저하게 함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라헬은 이토록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는 거리두기를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녀를 ‘자카르’하셨고 그 결과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은 영적 시사점이    큰 보고입니다. 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전혀 신앙이 없었던 라헬이 득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득남 이후 그 아들의 이름을 ‘야쎄프’라고 지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가 더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요셉의 탄생이 주는 영적 의미는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함을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은 자격 없는 라헬을 기억하셨듯이 오늘 자격 없는 우리들을 기억하십니다.

  이 레마를 생각하면서 느낀 소회는 감사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라헬은 형편없는 존재였습니다. 뭐 하나, 조건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억할 만한 건더기라곤 단 한 점도 없는 실망스러운 라헬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10남 1녀를 주신 하나님은 유일하게 자녀가 없어 절망하고 있었던 라헬을 생각하셔서 그녀의 태를 열어주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22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이 문장에 주는 묘한 뉘앙스를 새겨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셨다.” 라헬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원을 말했다는 증언이 창세기 30장에 있습니까? 단  한 구절도 보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녀의 소원을 들으셨다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생각하심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생각하심의 결과물이 라헬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 장로도 말합니다. 요한일서 4: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출애굽기 4:14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이 구절의 배경을 잠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80세에 이른 모세를 호렙 산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지도자로 삼으시기 위해 소명을 부어주십니다. 누가 너를 보냈느냐고 물으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보냈다’고 하라고 친절히 답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다시 되묻자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지팡이를 던지라’ 그러자 그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보이셨고, 다시 뱀 꼬리를 잡으라고 명하셔서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을 보이시면서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모세의 손이 나병 환자 손이 되었다고 다시 회복되는 이적도 보이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동시에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할 것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정도면 항복해야 하는 모세인데 나는 입술이 둔하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 다시 손 사레를 치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하시며 아론을 예비해 둔 것까지 고지하신 장면이 읽어드린 출애굽기 4:14절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를 다그치시면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우신 분이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세상에나, 이게 어디 말이 되는 일입니까? 깜도 안 되는 모세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바로 모세와 똑같이 조건과 자격을 보시지 않고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유구무언의 감동을 받습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께 나와 당신의 자격을 묻는다면 저도 여러분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자는 없습니다.

  오래 전, 부교역자가 공석일 때 교단 부교역자 청빙을 위한 채용 공고를 교단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몇 몇 교역자들이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들의 지원서를 받고 만나기 전에, 청년 학생들 대상의 짧은 설교 동영상을 촬영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한 명의 설교 동영상을 보면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전혀 설교의 기초가 안 되어 있는 지원자를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 한 명 지원자의 설교 동영상의 첫 장면을 보고 화면을 닫았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지원자의 복장이 설교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장이 아니라 대단히 자유로운 복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자기 관리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청원자를 부교역자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저도 부교역자 청빙을 위해 대상자의 자격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나의 자격을 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전적인 은혜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열어 요셉을 선물로 주신 것은 전적으로 라헬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며,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라헬 쪽에서 합당한 그 무엇을 갖고 하나님께 드리며 임신을 요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한 복이었습니다. 결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라헬이었다는 점을 말입니다.

2)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23-24절을 또 한 번 읽겠습니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구절에서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여호와는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실 것이다.” 이 고백을 문자적으로 놓고 보면 라헬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갖기 시작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3-24절에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된 것은 라헬의 신앙적 고백이라기보다는 후대 편집자들의 해석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23-24절 고백의 주체적 장본인이라면 그녀는 적어도 이후 그녀의 삶의 행보가 하나님을 향한 영적 변화의 증거가 삶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핀 드라빔 도둑질이나, 더 훗날 둘째 아들 베냐민 탄생 때도 그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라고 짓지 말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의 선물을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로 해석하지 말고 야곱의 개명 한 그대로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승리의 아들)으로 지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결국 라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긴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 것, 그래서 본인의 태를 열어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해 각별한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삶으로 변화시켰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이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여기저기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히브리서 2:1-3절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말씀도 권위가 있어서 그것을 어기거나 순종치 않았을 때 모두 공정한 처벌을 받았는데 하물며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맨 처음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증거 해 준 것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6: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이 표현을 저는 곧잘 이렇게도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업신여기는 자를 인정하시지 않는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자격이 없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아픔을 감내하시면 주신 은혜인데. 두 번째 주신 레마에 관련하여 라헬은 낙제점을 받은 학생입니다.

  오늘 야곱의 가족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교우들과 복기하고 싶은 최종적인 은혜는 이것입니다. 야곱이 네 명의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들과 딸들의 면면을 속속 들여다보면 결코 구속사의 기초적인 근거로 사용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12지파 기원이라고 말하기에는 대단히 부족해 보이는 죄인들의 집합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추잡한 가계도를 통해  태어난 12명의 아들들의 후손들을 통해 구속사를 완성합니다. 은혜이며 또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하고 성찰함으로서 나의 신앙을 다잡이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마무리 찬양은 우리가 곧잘 부르는 손경민 목사가 작곡한 ‘은혜’를 부르겠습니다. 가사를 음미하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해 주는 은혜가 밀려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같이 전혀 자격이 없는 존재를 조각하시고 만들어가면서 쓰시는 그 감동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지 말고 영적으로 복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