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5월 14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섬기는 가정에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한 가지씩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428장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  복음성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야곱의 가족 이야기 (3)
● 본문 : 창세기 30:9-21
1) 레아가 동생의 세속적 방법을 답습하여 실바를 통하여 낳은 아들들의 이름과 그 의미는?
① 7번째 아들의 이름과 의미는?
② 8번째 아들의 이름과 의미는?  

2) 레아가 직접 낳은 9-10번째 아들들의 이름과 그 의미는
① 9번째 아들
② 10번째 아들  

3) 적용하기
⓵ 레아가 ‘유다’에서 ‘스블론’으로 급전직하한 이유에 대해 심도 있게 나누어 보자.
⓶ 존 맥아더 목사의 갈파를 오늘 설교의 레마와 연관하여 오늘의 교훈으로 해석해 보자.
③ 아간과 사울의 패착이 오늘 나에게 주는 영적 시사점을 찾아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제목
⓵ 선포된 태신자 섬김을 매뉴얼에 맞추어 신실하게 실천하기 (제 3차 사역- 태신자와 식사 한 번 더하기 
⓶ 5월 28일 성령강림주일에 내 셀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나오도록
⓷ 세인 공동체가 2023년 구체적으로 부흥하도록
④ 환우들을 위하여 중보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지난 주간 제 2차 사역 점검하기 (태신자와 식사하기)
2. 태신자 섬기기 3차 사역 철저히 실시 (태신자와 식사 한 더하기)
3. 22-27일 주간은 지역에서 열린 모임 진행하기 주간. 셀 리더는 지체들과 상의하여 열린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여
    지역 열린 모임을 열고 태신자 초청하기. 반드시 실시하기.
4. 5월 28일 성령강림주일 전도 축제에 태신자 초청과 구원을 위해 전심하여 기도하기
5. 14일 주일 오후 예배 후에 열린 모임 교육에 참석하기
6. 주중 새벽 릴레이 기도회에 사명감을 갖고 참여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 창세기 30장 9-21절  제목 : 야곱의 가족 이야기(3)
 
본론) 본문 9-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 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하기에 따라 충격적일 수도 있다는 소회가 드는 구절입니다. 이미 살핀 대로 레아는 4명의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선방한 셈입니다. 이렇게 나름 선방한 언니를 본 동생 라헬은 여성으로 태어났고, 남편에게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몸에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 언니를 시기하는 마음으로 확산되었기에 자기의 시종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대리모 역할을 하게 하는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정서적 아들들을 얻게 되었음을 살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수요일 101번째 강해의 줄거리입니다.

  본문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동생 라헬이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몸종을 남편에게 바쳐 단과 납달리를 생산하는 기가 막힌 일을 목도한 레아를 긴장감 있게 소개합니다. 레아는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본인은 이제 다시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생각에 동생이 행한 비상식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기에 이릅니다. 자기의 몸종인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하는 극단적 경쟁의식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야곱에게 있어서 7번째, 8번째 아들을 낳게 됩니다.레아는 그들의 이름은 ‘갓’과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레아가 7,8번째 아들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이런 의도가 담겨 있는 작명이었습니다. ‘갓’은 ‘행운’이라는 뜻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행운이 동생 라헬에게로 흘러갈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갓’이 탄생함으로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더불어 실바를 통해 낳은 두 번째 아들을 ‘행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아셀’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여성이 자기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갓과 아셀의 탄생을 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레아를 비추어볼 수 있는 반면교사의 은혜가 있습니다.

※ 다시 후퇴한 레아의 믿음을 봅니다.

  우리는 이전 강해를 통해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고 난 뒤의 부분적인 신앙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누었습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야훼 하나님만을 찬양하라’라는 뜻의 유다라고 지었음을 살폈습니다. 첫째(르우벤), 둘째(시므온), 셋째(레위) 아들까지의 이름은 남편 야곱에게 목이 메어 있는 대단히 세속적인 상태를 표현했지만, 이것들이 헛된  것임을 알았던 레아는 넷째를 낳고서 야훼 하나님을 목도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며 아들의 이름을 유다로 명명했음도 조명해 보았습니다. 레아가 유다의 이름을 지은 신앙적 상태 그대로 자기의 삶을 유지해 나아갔다면 아마도 성경 역사라는 페이지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보고되고 있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좋은 레아 상을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레아는 넷째를 낳은 뒤, 신앙의 성숙으로 자신의 삶을 견인하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남편 사랑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들을 낳음으로서 첫째 아내라는 정체성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연약성으로 돌아가 여동생이 했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도진개진의 불신앙의 민낯을 그대로 표출함으로 믿음의 현장에서 퇴보하고 후퇴하였음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실바를 통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갓’이라고 명명함으로 빼앗길 뻔 했던 운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단히 샤먼적인 반응을 보였고, ‘아셀’을 얻고 나서는 나에게 세속적인 복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최면에 가까운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퇴보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제 본문에서 이런 막장 드라마의 절정으로 치닫는 레아와 관련한 야곱 가의 또 다른 슬픈 이야기를 마저 나누어 보십시다.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고든 웬함이 14절을 주석한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창세기의 연대가 정확하다면 레아의 첫 아들인 르우벤이 5-6살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로 보아 레아가 2년 간격으로 네 아이를 가졌고, 다음 얼마 동안 불임이었기에 르우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것으로 보인다. 맥추 때(5월)에 그가 몇 살이었든지 간에, 70인의 역 이후 ‘멘드레이크’ 즉 ‘뿌리는 마취제’로 이해된 ‘두다임’(본문에는 합환채로 번역)을 발견하였다. 이 맨드레이크는 정욕을 자극하는 것(아가 7:13)과 불임여성의 임신을 돕는 것으로 유명했다. 맏아들은 이를 불임 중인 어머니인 레아에게 가져왔다. 이것을 알았던 라헬은 그녀의 언니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형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라고 요구했다.” (고든 웬함. “WBC-창세기 주석”,p,446.)

  아마도 라헬의 절박한 심정을 담은 보고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언니 레아는 동생의 이런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도리어 모욕에 가까운 비수를 날립니다. 15절 전반절입니다.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남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합환체까지 요구하는 욕심을 부린다고 나무란 것입니다. 언니에게 냉정하게 거절당한 라헬은 예상했다는 듯이 한 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15절 후반절은 막장드라마의 끝처럼 여겨지는 세속적 욕망의 민낯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라헬은 합환체를 나에게 주면 남편을 하룻밤 언니에게 주겠다고 거래를 한 것입니다. 아연실색하게 하는 것은 이 거래가 성사된다는 점입니다. 그 보고는 16절입니다.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십시다. 더 중요한  그 결과물입니다. 이런 막장 가족의 관계로 이루어진 끝에 야곱은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바로 잇사갈과 스불론입니다.

  야곱의 전체 아들로 볼 때는 9,10번째 아들이며, 레아의 소생으로 볼 때는 5,6번째 아들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이후에 야곱은 레아에게서 유일한 딸이자 7번째 소생인 디나를 출산하였다고 보고합니다. 레아는 5번째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로 지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그가 보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합환체를 동생에게 건네준 뒤에 얻은 아들이기에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입니다. 더불어 6번째 아들을 ‘스불론’이라고 명했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선물’이라는 뜻이지만 셋째 아들 ‘레위’의 의미처럼 이제부터 남편이 나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레아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보된 이름 짓기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레아는 ‘유다’라는 이름 짓기에서 보았던 영적 회복에서 후퇴해 다시 남편에게 목을 거는 세속적 욕망으로 퇴보한 모습을 독자들인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레아는 왜 영적으로 이렇게 퇴보했을까요?

※ 믿음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세속적 욕망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라헬이 시도한 세속적 방법들이 크게 보였습니다. 언제나 세속적인 시도들은 그럴 듯한 모양새를 연출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그렇고, 안목의 정욕이 그러며, 이생의 자랑이 그럴듯합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보이지 않고, 당장의 효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의 싸움으로 이런 부류를 이겨나가는 자들이 극히 적습니다.
  여호수아의 진두지휘와 하나님의 응원하심으로 난공불락을 여겼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쾌거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을 입성함에 있어서 대단히 고무적이고 사기를 세워주는 등등의 엄청난 승전보였을 것입니다. 헌데 여리고를 무너뜨리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감당했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대단히 엄위하고 신중하게 경계했던 메시지가  여호수아 6:2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어떤 측면으로 보면 저주에 가까운 경고문을 여호수아가 신앙공동체에게 날린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가나안적인 일체의 산물들을 완전히 척결함과 동시에 다시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한 원천봉쇄를 의미합니다. 언제든지 나약한 인간은 가나안의 문화, 종교, 사회적 패턴들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리고가 그 가나안이라는 세속적 모드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여호수아는 근원적인 가나안 문화와의 완전한 결별과 척결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호한 경고를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가나안의 세속적인 유혹에 무너져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을 대패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여호수아 7:21절을 만나보겠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훗날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가나안의 유혹을 온전히 척결하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사무엘상 15:9절입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언제나 인간은 믿음의 내용들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합니다. 반면 세속적인 내용들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보에서 여지없이 나를 탈락하게 만드는 영적 원흉과도 같은 요소입니다. 레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작아보였습니다. 도리어 전적인 세속의 목소리인 ‘단’(들음)과 ‘납달리’(경쟁하여 이김)가 크게 들렸습니다. 그러기에 레아는 굴복하고 자기 역시 세속의 소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유다의 신앙을 저버리고 ‘갓’(행운)과 ‘아셀’(행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땅히 세속적 값을 치른 뒤에 얻은 ‘잇사갈’은 마땅하다는 정당성을 항변했고, 끝내는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내 남편은 나에게로 돌아와 나와 함께 연합하게 해 줄 선물이라고 인식했던 스불론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야곱 가의 씁쓸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믿음의 자리에서 후퇴한 레아를 보며 레아와 관련된 스토리는 오늘 독자들인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반면교사 삼도록 만들어주는 자극제를 선사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복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존 맥아더 목사의 이 글을 읽다가 밑줄을 그어 놓았습니다.
“당신이 기독교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변경시킨다면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가 아니다.”  (존 맥아더, “값비싼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p,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아가 낳은 아들들의 이름들을 통해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레아가 지니고 있었던 자의적이며, 임의적이며, 자기감정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려는 무모함 때문입니다. 신앙의 퇴보는 원래 하나님을 자기 기분에 맞게 해석하려는 일체의 시도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면에서 존 맥아더의 일성은 큰 울림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속적인 건더기에 여전히 붙들려 있을 때 나는 조금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발자국을 뗄 수 없음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붙들려 사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