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544장- 울어도 못하네 ● 복음성가: 내 이름 아시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야곱의 가족 이야기 (1) ● 본문 : 창세기 29:31-35 1) 레아가 낳은 초기에 낳은 네 아들의 이름과 그 의미를 말해 보자. 2) 넷째 아들 유다가 갖고 있는 영적 의미를 레아의 마음으로 나누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나에게 있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무엇인가? ⓶ 나는 지금 유다로 살고 있는지 점검하자. ③ 세상의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를 누르고 있다면 역전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선포된 태신자 섬김을 매뉴얼에 맞추어 신실하게 실천하기 (5주 사역) ⓶ 5월 28일 성령강림주일에 내 셀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나오도록 ⓷ 세인 공동체가 2023년 구체적으로 부흥하도록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셀 사역을 반드시 진행하고 교제하기 2. 셀 원 중에 아직 태신자를 정하지 못한 지체 권면하고 가족을 태신자로 드린 지체는 한 명을 더 선정하기 3. 4월 30일-5월 6일 주간 사역에 대해 철저히 진행하기 태신자 관계 맺기 1차 사역, 셀 그룹에 제출된 태신자와 만나서 차 마시기 4. 5월 15-21일 주간은 지역에서 열린 모임 진행하기 주간 셀 리더는 지체들과 상의하여 열린 모임 날짜를 정하여 지역 열린 모임으로 태신자 초청하기. 반드시 진행하기. 5. 5월 28일 성령강림주일 전도 축제에 태신자 초청과 구원을 위해 전심하여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서론) 2020년 11월 4일에 창세기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2년을 넘어섰습니다. 오늘이 100번째 시간이니까 1년을 52주로 간주할 때 2년이 채 안 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중간, 중간 특별예배를 수요일에 드리다보니 창세기 공부가 햇수로는 3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창세기 강해가 끝날 때까지 우리 교우 모두가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또 은혜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과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취한 네 명의 아내를 통해 낳은 자녀들이 소개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술에 취해 아내로 맞이한 첫 번째 아내인 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소개하는 본문입니다. 헌데 레아가 낳은 네 명의 자녀들에게 명명된 이름을 보면 이 안에 중요한 신학적 교훈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를 바라보면 어떤 의미에서 최대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야곱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여동생에게만 사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기실, 레아는 야곱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밧단아람이라는 지역의 당시 상황은 철저한 가부장적인 사회였기에 아버지 라반이 강제적으로 진행한 야곱과의 결혼을 행한 것이 그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여동생을 사랑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할 리 없습니다. 아마도 레아에게는 한이었을 것입니다. 레아의 이 한에 대하여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따뜻한 배려로 인해 레아는 자녀를 낳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30장을 함께 살펴보면 레아는 6남 1녀의 자녀를 얻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먼저 얻은 네 아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가 낳은 장남의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의미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밧단아람 즉 하란이라는 지역은 대단히 엄격한 가부장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자녀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레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레아가 낳은 6남 1녀의 이름을 모계인 레아가 직접 지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야곱이 별로 사랑하지 않은 여인 레아에게서 단지 성적인 욕구라는 본능을 채우기 위해 행한 부부관계로 인해 생긴 아들들에 대하여 무관심했을 가능성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런 이유 때문에 남편에 대해 항의하는 행동의 일환으로 레아 스스로가 직접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지 레아와 야곱의 관계는 대단히 서글픈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에 여성의 경우, 더 더욱 진한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레아는 대단히 아픈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분명히 본처임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겨 버린 기구한 여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간 첫 아이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애증의 결과물로 첫 아이의 이름을 ‘르우벤’ 즉 ‘보라 아들이라’라고 작명한 것입니다. ‘보라, 아들이라’는 이름에는 레아의 아픈 심증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김중기 박사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레아는 첫 아들을 낳자 ‘보라,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부른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남편에게 보일 때마다 당당하게 ‘보라, 아들이라’하지 않았을까요? 동생 라헬에게는 더욱 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보라, 아들이라’하면서 정실 아내로서 첫 아들을 낳음으로 해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 졌음을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보라, 아들이라’라고 부를 때마다 가슴 속에 쌓였던 울분과 설움도 함께 토해져 그녀의 한을 조금씩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김중기, “약자에게 일어난 신앙사건-성서 속의 여인들” 예능, pp,27-28)
결국 ‘르우벤’이라고 첫 아들의 이름을 직접 작명한 것은 빼앗긴 남편의 사랑을 되찾고 싶어 하는 당연한 욕구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이제 3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이렇게 ‘르우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헬보다 레아에게 사랑을 주는 것에 인색했나 봅니다. 또 어떻게 하여 두 번째 아들을 레아가 낳았는데 둘째 아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역시 레아가 직접 작명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들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레아에게 있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은 사실 더 아픈 상처로 인해 지은 이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어떤 아픔일까요? 르우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좀처럼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 인해 당한 고통을 듣고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는 의미로 ‘시므온’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레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제 고통을 아시지요?, 원수 같은 남편아, 내 고통을 아니? 이런 기구한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은 토로가 둘째 아들 ‘시므온’에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셋째 아들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셋째 아들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연합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은 뒤에 어떤 면에서는 최후의 통첩이라고 할 수 있는 선언을 한 셈입니다. 제발, 나와 연합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이제 셋째 아들까지 낳았으니 남편이 자기에게로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거나 아니면 정말로 마지막으로 그런 기대감을 갈고 이름을 ‘레위’라 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자기와 연합하게 될 것이라는 마지막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우리는 레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본문 마지막 절인 3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레아는 출산이 멈춰지기 전에 넷째 아들을 낳았는데 넷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음을 보고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이제는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뜻입니다. 엄청난 교훈이 ‘유다’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레아가 아들들을 낳으면서 이름을 지었던 과정의 클라이맥스를 넷째 아들의 이름짓기에서 찾고 싶습니다.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남편 야곱에게 목이 메어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함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레아의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첫 아들을 낳았을 때의 당당함도 사라졌고,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의 고통 정도는 남편이 알아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 또한 사치스러운 일이었고, 셋째를 낳고 나서는 남편이 자기에게로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소망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레아는 남편에게 걸었던 일체의 일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레아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거는 소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았던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으면서 마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삶을 남편에게 목메는 삶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는 진정한 영적 회심을 깨닫고 신앙의 출발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찬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자기의 삶을 다시 출발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기록인 30장의 메시지를 전제한다면 레아의 이런 결단은 완전한 회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고 받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아들을 낳은 사건들을 추적해 보면 분명하게 유다 출산이 레아가 본인의 삶을 하나님께 돌리는 영적 성장의 계기판이 되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보고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와 여러분은 중요한 레마를 찾아야 합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하는 삶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삶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삶을 목표를 맞추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그리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레아도 세 번에 걸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사람에게 희망을 걸었으니 결코 이 싸움이 녹록한 싸움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직시할 것은 사람에게 희망을 걸 때,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좌절임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4: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우리가 잘 아는 드보라 사사가 가나안 야빈의 군대와 일전을 앞두고 바락에게 함께 참여할 것을 종용합니다. 드보라가 아비노암의 아들인 바락에게 가나안과의 싸움을 독려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싸움에서 가나안을 넘겨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 4:7절입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바락은 드보라의 이런 확실한 승리를 보장으로 함께 전쟁에 나갈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사사기 4:8절입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무슨 말입니까? 바락은 하나님이 드보라에게 가나안을 넘겨주겠다고 하셨다는 약속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드보라가 같이 싸움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각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는 전형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모델입니다. 그 결과, 바락에 임한 승리의 결과물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사사기 4:9절을 봅니다.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그렇습니다. 싸움에서 이겼는데 그 이김으로 인한 영광은 타인에게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빈 영광을 바락은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성을 갖고 부침해야 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들고 또 사수해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그 분의 아버지이신 야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 역시 이 경우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교회가 정말로 어려웠을 때, 사람을 의지하려던 마음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의지하려는 사람에게 등 뒤로 칼을 맞았습니다. 영락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목양의 현장에서 저를 크게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교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교훈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사람과 동역하려고 합니다. 제가 무슨 독불장군도 아니고, 혼자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원칙은 있습니다.
동역은 하되 그를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이 흔들리면 목회의 근본이 흔들립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르우벤을 외치고, 시므온도 외치며, 레위도 외쳐봅니다.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헛헛함이 대부분입니다. 실망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뒤늦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들의 싸움은 유다를 외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신앙의 상태는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아닙니다. 오직 유다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야훼 하나님만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만이 내가 의지할 대상임을 인정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신앙의 고백 위에 승리가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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