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2:1-7 제목: 잘못된 신앙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입다는 자기의 쓸데없는 고집과 불신앙으로 인해 소중한 딸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전적인 본인의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불행이었습니다. 아마도 입다의 심리는 대단한 불안정과 고통의 시기였음에 분명합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7절이 이것을 충분히 추측하게 합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가장 짧은 사사 재위를 기록한 입다에 대한 보고에는 항상 사사들의 시역이 마감될 때마다 상용 어구처럼 등장했던 몇 년의 평화가 임했다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딸을 죽인 죄책감으로 인해 그는 사사의 직을 오래 동안 수행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합니다. 입다의 시대에 평화가 임하였다는 사사기 기자의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건 때문입니다. 딸을 불태워 죽인 참담함을 맛본 입다에게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걸어온 사건입니다. 미디안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배제하여 우리들이 받을 전쟁 승리 이후의 몫을 얻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시비 거리였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사기 8장에서 전술했던 기드온 시대의 선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얄팍한 이런 시비는 기드온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드온은 여러 가지의 정치역학적인 구도 때문에 에브라임지파를 달랬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최고의 우수한 지파고, 미디안과의 승리를 포함한 이제까지의 위대한 일들은 모두 다 에브라임 덕이라고 아첨함으로 에브라임의 노를 풀었다고 사사기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사사기 8:1-3) 이런 덕을 보았던 얍삽했던 에브라임은 입다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주지했듯이 입다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누구든지 걸리기만 그만 놔두지 않겠다는 입다의 폭력적 심리 기제가 극도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바로 이 상태에 에브라임이 불을 지른 것입니다. 불과 몇 해 전, 입다는 자기의 집에 불을 붙였던 사람입니다. 딸을 번제로 드린 상황을 설명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시 또 그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입니다.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1절 후반절) 가뜩이나 상처로 인해 무너져 있는 입다의 상흔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소금을 뿌린 격이 된 것입니다. 본문 2-6절까지의 내용은 일어나지 말아야할 이스라엘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담고 있습니다. 입다는 에브라임 족속을 향하여 이렇게 질타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죽기를 각오하고 암몬과 싸울 때 내가 너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지만 뒷짐을 지고 있다가 이제 와서 전쟁 승리를 콩고물을 얻겠다고 뒷북을 치며 전쟁을 하겠다는 너희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요구하니 받아주겠다.”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아첨을 해서 위기를 벗어났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입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를 합니다. 결국 4-6절의 보고에 의하면 입다의 군대는 에브라임을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제압했다고 보고합니다. 제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씨를 말리는 무자비함을 5-6절에서 보고합니다. 내전 승리로 요단 강 나루턱을 중심으로 패권을 장악한 길르앗 사람들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붙들고 한 가지 웃지 못 할 촌극을 벌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중에 ‘개울’이나 ‘이삭’을 뜻하는 단어를 길르앗 사람들은 약한 'S'의 음역으로 ‘쉬보레트’라고 말하지만 에브라임 사람들은 강하게 ‘씨보레트’라고 발음을 한다는 것을 알고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발음해 볼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강하게 발음하여 ‘씨보레트’로 발음하는 자를 골라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골라 42,000명이나 집단 살해했음을 사사기 역사가는 증언합니다. 이번 호를 통해 주시는 영적 레마를 생각해 보십시다. * 잘못된 신앙은 그래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짓말은 현대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했고, 완전무결하고 결정적인 것까지 되었다.”(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이숲, 2019,p,40) 저는 이번 호의 글을 쓰다가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몄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 시대의 일체의 사람들의 비정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기회주의, 길르앗 사람들의 무자비함 등등. 그러나 이런 일련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사사 입다의 잘못된 신앙으로 시작되었음을 다시 똑바로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경우에 입다가 완전한 사람으로, 또는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암몬에서 구원한 정점의 구원자로 묘사되는 경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앙이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한 사람의 그릇된 종교적 행위가 이런 비극의 단초였습니다. 2020년에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그릇됨은 그릇됨이라고 자인하는 한국교회와 나를 회복시키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오늘따라 임마누엘 칸트가 한 말이 자꾸만 기억 속에서 떠오릅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필자 주: 돌아보지 않는) 인간은 사물보다 못하다.” (임마누엘 칸트,“도덕론, 볼륨2”,p,8.) 사물보다는 나은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감동의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하며 두 손 모읍니다. |